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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스피릿
2002-07-03

발굽은 지축을 뒤흔들고 갈기는 기개에 나부끼네

■ Story

스피릿은 미국 서부의 광활한 평원 ‘올드 웨스트’를 달리는 야생마 무리의 지도자다. 태양과 바람, 숲이 부르는 소리를 들으며 성장한 그는 강인하고 자유로우며 꺾이지 않는 영혼을 가지고 있다. 스피릿이 멀리서 반짝이는 불빛을 발견한 어느 밤, 그의 운명은 예상하지 못한 고난 속에 내던져진다. 모닥불을 피우고 야영을 하던 백인들에게 사로잡힌 것이다. 스피릿은 미국 기병대 요새에 갇힌 뒤에도 굴복하지 않다가, 역시 포로로 잡힌 인디언 청년 리틀 크릭과 함께 탈출한다. 그러나 이들 앞에는 더욱 험난한 여정이 기다리고 있다.

■ Review

<스피릿>은 제작비 8천만달러를 ‘올드 웨스트’의 탁 트인 대기 속에 모두 날려버릴 수도 있었을 모험을 감행했다. 야생마의 시선으로 미국 서부 개척의 역사를 다시 쓰기 위해, 야생마의 언어를 택한 것이다. 대사가 거의 없다는 점에서 팬터마임에 가까운 <스피릿>. 이 영화는 지루해질지도 모르는 위험과 함께 애니메이션의 한 고비를 넘어야 하는 도전을 떠안고 있었다. 표정과 동작만으로 드라마틱한 감정을 전달하려면, 애니메이터의 손과 창조력이 연기를 대신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지난한 과정을 앞에 두었던 때에도 선택의 여지는 크지 않았다.

감독 켈리 애즈버리는 “말이 말을 하면 코미디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말하는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사람은 거의 없을 것 같았다”고 결단의 순간을 회상했다. 가장 먼저 던져진 과제는 말의 움직임과 울음소리, 그에 실려 발산돠는 감정을 익히는 일이었다. 맷 데이먼의 내레이션과 군데군데 흐르는 노래가 사건을 설명하기는 하지만, <스피릿>은 야생마에게 극의 흐름을 온전히 내맡긴 영화였다. 그 때문에 애니메이터들은 말 조련소에서 비슷한 도약에도 공포와 기쁨이라는 상반된 감정이 담겨 있다는 것, 구분할 수 없는 울음에도 각기 다른 용어로 정의되는 범주가 있다는 것을 배웠다. 다행히 작가 존 푸스코는 스피릿의 종자이기도 한 머스탱을 스무 마리 넘게 키우는 사람이었고, 말을 사랑하고 이해하는 사람이었다. 커다란 굴곡은 없어도, 그의 시나리오는 진심을 담고 있었다.

<스피릿> 제작진은 이처럼 어려웠던 임무 위에 몇겹의 숙제를 동시에 떠안았다. 제작자 제프리 카첸버그는 “손으로 쓴 편지와 이메일이 다른 것처럼” 컴퓨터 그래픽이 애니메이터의 공들인 터치를 대신할 수 없다고 믿었다. 그는 3D 배경 위에 2D 캐릭터를 싣고자 했고, 연필 그림을 스캔해 사용하는 ‘툰슈터’처럼 새로운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옆으로 긴 말의 신체와 여덟 군데 국립공원을 바탕으로 창조한 ‘올드 웨스트’에 적합한 시네마스코프 화면, 디자인 단계에만 아홉달을 소비했던, 아찔하게 평원과 계곡을 가로지르는 3분의 오프닝, 해부학자의 조언을 받아가면서 연기에 적합하도록 개조한 말의 이목구비. 상영시간이 84분밖에 안 되는 <스피릿>은 이렇게 수많은 고난도의 장애물을 넘으며 야생마 스피릿의 여행을 마무리했다.

제프리 카첸버그가 이 영화는 디지털과 수작업을 합성했다는 의미에서 ‘트래디지털’(tradition+digital)이라고 자랑스럽게 소개한 것은 순박한 외양 밑의 고충을 충분히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스피릿>은 “모든 규칙을 깨겠다”는 카첸버그의 선언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있는 영화다. 예정된 해피엔드로 치닫는다 해도, <스피릿>은 한번도 자신의 목소리를 가져보지 못한 자, 그러나 한시도 정체성과 책임감을 잃지 않으면서 싸워온 자의 자긍이 담겨 있다. 스피릿은 하늘을 날듯 널찍한 벼랑 사이를 도도하게 뛰어넘는 야생의 종마다. 그는 포기하려는 순간에도 눈발 속에서 돌아가야 할 고향을 떠올리며 무릎 꿇은 동료들을 추동한다. 몸을 던져 리틀 크릭을 구해주면서도 자신이 지켜야 하는 야생마 무리를 잊지 않는다. 브라이언 애덤스와 한스 짐머가 사운드트랙 중에서도 <I Will Always Return>을 가장 먼저 완성했다는 사실은 그래서 더욱 의미심장하다.

자유로운 영혼을 강조하는 <스피릿>은 또한 편협한 구분 대신 긴장 속에 언뜻 스쳐가는 교감을 발견하는 애니메이션이기도 하다. 스피릿을 길들이지 못해 안달했던 기병대 대령이 절벽 위로 날아오른 스피릿과 리틀 크릭을 보내는 장면은, 마치 고수들이 서로의 세계를 인정하는 절정을 보여주는 것 같다. 스피릿은 대령이 악당이 아니라 개척의 신념을 밀고 나가는 충실한 군인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이것도 스피릿과 리틀 크릭이 주고받는 눈빛엔 미치지 못한다. “포기하지 않을 친구니까”라며 잠시 틈을 내주는 스피릿, “너는 누구도 네 등 위에 태우지 않겠지”라며 울타리 문을 활짝 여는 리틀 크릭. <스피릿>은 둘이 아무리 친밀하다 해도, 스피릿이 인디언 마을에 주저앉는 순간 갇히게 된다는 사실에 눈감지 않는 것이다. 그런 정직함이 있기 때문에 <스피릿>은 패기있게 초원을 질주하며 잊혀진 역사를 되살려낼 수 있다.김현정 parady@hani.co.kr▶ [Review] 스피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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