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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놀았다, 그거면 됐다 / 조종국
2002-07-18

뒷북이지만 월드컵 축구대회 이야기 한번 해야겠다. 월드컵이 열리는 기간 내내 극장가는 그야말로 파리를 날렸다. 한국 대 폴란드 경기가 있던 날 부산의 어느 극장은 하루 관객 수가 겨우 수십명에 그치기도 했고, 심지어 어느 극장은 평소 하루 만명대 관객이 들었는데 100명대로 뚝 떨어지기도 했다. 월드컵 열기가 한창이던 때 만난 한 관계자는 한국이 16강에 오를 때까지만 해도 열광했는데, 8강전부터는 ‘이제 그만…’ 하고 빌고 있다니 오죽하면 저럴까 싶었다.

월드컵이 시작되기 전, 내심 월드컵과 영화흥행의 상관관계가 무척 궁금했다. 연감을 뒤져 미국, 프랑스월드컵이 열렸던 때의 흥행성적을 찾아봐도 월드컵이 영화흥행에 그다지 큰 변수는 아닌 듯했다. 주로 새벽에 중계방송을 봐야 했던 이전 대회와 달리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대회라 그래도 적지 않은 영향이 있을 것이라는 짐작은 했다. 하지만 결과는 재난에 버금가는 정도였고, 월드컵의 위력에 새삼 혀를 내두를 뿐이었다.

월드컵 기간 내내 나는 참 외로웠다. 원래 축구를 좋아하는데다가(사실 난 초등학교 6학년까지 차범근을 숭배하던 축구선수였다. 제법 동네에서 알아주던 골잡이였지만 축구부 있는 중학교로 진학하지 않았다. 체구가 작기도 했지만, 아주 솔직히 말해 공부도 1등하고 전교 어린이회장이었던 나는 당시만 해도 공공연했던 ‘운동선수는 돌대가리’라는 하대가 싫었고, 무지막지한 체벌과 스파르타식 훈련이 싫어서 축구를 그만뒀다) 유명 선수들의 활약상을 ‘감상’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었지만, 온 나라가 ‘발광’하는 분위기에는 쉬이 어울릴 수 없었다. 회사에서도 한국 경기 때마다 거리 응원에 나서는 스탭들 머쓱할까봐 호응하는 흉내는 냈지만, 구름같이 몰려다니는 사람들의 ‘과잉’(내가 느끼기에는)이 내내 불편했다.

거리 곳곳에서 그토록 열성적으로 응원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참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그동안 신나고 즐겁게 놀 만한 ‘건수’가 없었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열광적인 월드컵 응원이 나라사랑, 축구사랑보다는 내놓고 소리지르고 어깨춤도 추고, 발 구르고 박수치며 놀기에 딱 맞는 이벤트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에겐 (돈 내고) 영화 보는 것보다 평소에는 무단횡단조차 할 수 없었던 큰길을 (공짜로) 점거하고 함께 뜀박질하는 게 훨씬 (경제적이고) 재미있는 행사였던 셈이다. ‘잘 놀았다’ 그러면 됐지, ‘월드컵 응원 열기를 사회적 에너지로 승화시켜야 한다’(무슨 말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거나 국력, 경제력이 어쩌고 하는 주장은 영 마뜩찮다. ‘월드컵 계승 국운융성 염원 결의대회’ 같은 소름끼치는 집회라도 열까봐 두렵다. 그 논리라면 거리 응원에 나섰던 사람들이, 미군의 과실로(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여학생이 목숨을 잃었는데도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려는 처사에 항의하는 대규모 집회라도 열어야 되는 것 아닌가(솔직히 좀 그랬으면 좋겠다). 월드컵으로 촉발된 노는 문화가 곳곳에서 좀더 다양하게 확산되길 바라고, 영화쪽에서도 그 득을 좀 보면 좋겠다. 월드컵 기간 동안 극장에 파리 날린 관객분들, 벌충으로 친구 한명씩 더 데리고 극장에도 갑시다…. (꾸벅)조종국/ 조우필름 대표 kookia@jow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