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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한번 믿어보시라니깐요 / 심재명
2002-07-24

며칠 전, 영화배우 박중훈씨와 전화 통화할 일이 생겼다. 목소리가 갈라졌기에 물었더니, 어제 “승우씨 나오는 <라이터를 켜라> 시사회 보고 기분 좋아서 승우씨 등과 술을 마셔서 그랬다”고 한다. 이제껏 김승우가 출연한 모든 영화의 흥행성적을 합한 만큼 들 것 같다고도 했다. 나는 안 봐서 모르겠다고 했던가? 아무튼.

그날 오후에 그 말이 진짜인지 궁금해져서 부랴부랴 도심의 한 극장으로 달려가 오후 표를 끊었다. 표를 끊고 주차를 위해 명동 한복판으로 차를 끌고 갔다가 휴일을 즐기는 청춘남녀의 인파에 꼼짝달싹 못하다가 겨우 차를 대고, 달려갔으나 이미 영화는 15분이 흘렀다.

꽉 찬 좌석 사이를 뚫고, 비집고 앞에서 두 번째에 앉아 목을 빼고 보았다. 15분을 놓쳐서 허봉구의 머리 힘이 왜 세졌는지, 우동 그릇이 어떻게 박살났는지를 보지 못했다. 어느덧 시간이 지나면서, “300원짜리 1회용 가스 라이터”를 다시 손에 넣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그가, 어느 순간 자신의 머리통이 세다는 걸 자각하지만 남용은 하지 않는, 의협심이 아니라 상황에 몰려서 위험천만하게도 기차 위로 기어올라가는, 그냥 우리 옆에 있는 조금 멍청한 친구 같은 허봉구가 관객의 마음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김승우라는 배우가 제대로 된 캐릭터를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런저런 기사들을 보니, “감독님 잘 모르겠어요. 감독님이 나 많이 도와줘야 하는데”라고 김승우는 주저하고, 헷갈려 했다고 한다. 그때 감독은 대담 내용대로 “아이씨, 내 한몸 추스르기도 힘든데…” 하며 난감해했다지.

예전에, <코르셋>을 제작할 때, 김승우씨를 캐스팅하기 위해 늦은 밤 집엘 찾아간 적이 있다. 시나리오나 자신이 맡을 역할에 미심쩍어(!)하는 그에게 어쩌고저쩌고 구라를 풀었다. 어떻게 만드실 계획인데요? 이 인물은 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하죠? 라고 물으면 제작자나 감독은, 이리저리 이것저것 현명한 답을 내놓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사실은 나도 잘 몰라요! 당신과 하면 잘될 것 같으니까 하자고 하는 거요. 이 영화가 잘될지, 안 될지는 정말 나도 잘 몰라요, 라고 얘기하고 싶지만, 정작 입에선 어쩌고저쩌고 쑥스러운 ‘구라’가 나온다. 뒤통수에선 땀 한 방울 흐르기 일쑤다. ‘진심’을 꼭 말로 해야 아나? 시나리오를 보고, 만들려고 모인 이들의 태도와 눈빛을 보고, 믿고 하면 되지 않나? 그런 생각도 뒤따른다. 그 어색한 심정 때문에 굳이 ‘구라’라고 속되게 표현했다.

어쨌든, 본인도 긴가민가했다고 했지만, 김승우란 배우는 적어도 내 생각에 좋은 캐릭터를 만나서 퍽 다행이라고 얘기하고 싶다. 긴가민가했던 의구심이 어쩌면, 더 나은 연기를 끌어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요즘은, ‘구라’칠 기회가 점점 줄어든다. 시나리오를 읽고 어쩌고저쩌고 만나서 얘기하기 전에, 그냥 전화 한 통화로 “못하겠는데요”, “어렵겠는데요”란 답이 돌아온다. 그걸로 끝이다. 또 때론 그런 전화도 오지 않는다. 의심쩍고, 긴가민가하고, 그 감독과 제작사를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가 아니라, 요즘은 애초부터 배우와 매니저의 나름의 계획과 노선에 따라 결정하고 그것을 우선으로 움직이는 것 같다. 땀 뻘뻘 흘리며 “일단 한번 믿어보시라니깐요”라고 외쳤던 옛날이 그립다.심재명/ 명필름 대표 shim@myungfil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