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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오아시스
2002-08-13

사막같은 세상에서 낙원의 꿈을 꾸다

■ Story

홍종두(설경구)는 29살에 전과 3범이다. 사람 치어 죽이고 뺑소니친 죄로 2년 반 복역하고 막 출소했다. 식구들은 그 사이 연락도 없이 이사를 해버렸다. 종두가 힘들게 집에 찾아온 뒤에도, 식구들은 그를 반기지 않는다. 형이 중국집 배달원으로 취직시키지만 산만하고 의지도 박약한 종두는 엉뚱한 사고만 낸다. 그 와중에 뺑소니 피해자 가족을 찾아갔다가 사망자의 딸 한공주(문소리)를 만난다. 뇌성마비 장애자인 공주의 가족들은, 공주의 명의로 분양받은 장애자 아파트로 입주하면서 공주를 전에 살던 낡은 아파트에 버려두고 간다. 옆집 여자에게 매달 20만원씩 주면서, 공주에게 밥 챙겨주라는 부탁을 남기고. 사회로부터 냉대받기 마찬가지인 종두와 공주는 동병상련처럼 가까워진다.

■ Review

<오아시스>는 쉽고 단순한 이야기다. 사회로부터 손가락질받는 남녀가 편견과 냉대를 딛고 진심어린 사랑을 이루는 이야기라고 요약해도 무리가 없다. 한 문장으로 달리 말할 방법도 없다. 전개방식도 갈등, 위기, 절정으로 이어지는 익숙한 드라마의 구조를 따라간다. 종두와 공주의 순정이 두터워지는 것에 비례해 주변의 불신과 오해가 증폭된다 → 둘이 섹스를 나누는 순간 가족들에게 들켜 종두가 공주를 강간한 것으로 내몰린다 → 종두가 경찰서에서 도망나와 공주에게 꼭 필요한 무언가를 해주고는 다시 잡힌다 → 종두는 감옥에 갔지만 편지를 주고받으며 출소를 기다리는 둘에게서 희망적인 기운이 보인다.

선한 두 주인공이 오해받아 벼랑으로 몰리는 걸 보면서 애가 탈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불편해해야 할 내용은 아니다. <박하사탕>의 영호처럼 관객의 감정이 이입되는 주인공 스스로가 비열한 짓을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연신 코를 훌쩍거리며 어딘가 모자란 듯 말하는 종두와 말 한마디 하기 위해 온몸을 뒤트는 공주, 볼품없는 둘을 주인공으로 내세워놓고 아무런 수식이나 치장없이 둘의 사연을 따라간다. 그 정점에서 종두가 공주에게 해주는 일은, 즉 둘 사이의 사랑의 실현은 종두가 공주 아파트 앞의 나뭇가지들을 잘라주는 것이다. 혼자 사는 공주에게, 매일 보는 벽걸이 카펫의 오아시스 그림을 찔러대는 나뭇가지 그림자는 가장 큰 공포였던 것이다. “사랑은 상대방의 판타지를 실현시켜주는 일”이라는 이창동 감독의 소박한 정의에 담긴 진심을 외면하기란 힘들다.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이 우리편, 저편으로 구분돼 평행선을 달리는 구성을 작위적으로 받아들이는 관객이 있다 하더라도, 나무에 올라가 가지를 자르며 춤추는 종두를 보고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을 듯하다.

♣ 연신 코를 훌쩍거리며 어딘가 모자란 듯 말하는 전과자 종두와 말 한마디 하기 위해 온몸을 뒤트는 공주. 그러나 두 사람이 만나 사랑하는 순간 공주의 꿈은 현실로 나타난다. ˝사랑은 서로의 판타지를 실현시켜주는 일˝이라는 이창동 감독의 말처럼.

쉬운 이야기에, 절정과 해피엔드가 있지만 <오아시스>가 명쾌한 영화는 아니다. 불편하다거나, <박하사탕>처럼 독이 있다는 반응도 나온다. 섹스하다가 들킨 종두가 벌거벗은 채 내몰리고, 가족들은 한치의 의심없이 강간으로 단정하는 데 더해 합의금을 계산한다든지 하는, 호남 사투리로 ‘징한’ 대목들이 있다. 그러나 가족들이 악하기보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인물들로, 관객 자신조차 그럴지 모른다고 생각하게끔 그려진다. 영화의 폭과 두께를 더하는 이런 리얼리티가 잠시 힘들게 다가올 수는 있어도 영화 자체를 불편한 영화로 만드는 건 아니다. 그보다 <오아시스>는 관객의 감정이 어느 순간에 누구에게 이입이 되도록 일러주지 않는다. 반대로 그 순간을 흩트려놓는다. 이 감독은 연출의 변에서 “나는 관객이 충돌의 경계에 있도록 하고 싶었다… 내가 만든 싸구려 판타지의 세계로 깊숙이 끌어들이고 싶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경계선 밖으로 멀리 밀어내고 싶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주인공 둘다 감정이입이 쉽지 않은 인물이지만, 그래도 장애인보다는 전과자가 낫다. 영화는 전반 3분의 1가량을 종두라는 캐릭터의 설명에 할애한다. 일없이 놀면서 아무런 위기감을 안 느끼는, 철이라곤 없는 인물이지만 천진함에서 비롯하는 정직한 시선을 가진 매력적인 캐릭터다. 이 인물을 징검다리삼아 공주에게 다가간다. 그러나 공주는 장애자, 그것도 뇌성마비이다. 이 캐릭터에게 쉽게 감정이 이입되도록 하는 건, 장애자와 일반인을 차별짓는 현실의 무수한 모순들을 감추는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에 위험하다. 영화는 조심스럽다. 처음에는 종두의 시점으로 공주를 비추더니, 뒤로 갈수록 제3자의 시점으로 공주를 잡는다. 공주가 꿈꾸는 판타지 장면은 볼품 없고 생경할 정도여서, 관객과 공주와의 동화는 무조건반사로 차단된다.

공주부분만이 아니다. 영화는 애써 관습적인 장치들을 버린다. 핸드헬드로 프레임을 흔들고, 일체의 음악을 배제한다. 그러나 이야기는 일방통행이다. 전과자와 장애인이라는 인물 설정부터 메세지가 되지 않을 수 없다. 그 메세지 외에 다른 아이러니를 허용하기 힘들 만큼 꽉 짜여진 이야기를, 인물과 동화되지 않고서 어떻게 볼 수 있을까. 동화되려다 차단당하는 순간들을 감내하느라 쌓인 긴장감이 반성을 촉구하기를 기대한 걸까.

♣ `철가방` 종두는 우연히 마주친 영화촬영팀을 열심히 쫓아간다. 영화 속의 근사한 오픈카는 남녀주인공을 태우고 멋지게 달리지만(왼쪽) 현실 속 종두와 공주의 데이트는 낭만적인 드라이브가 못된다. 막히는 청계고가에서, 종두는 공주를 번쩍 안아들고 나와 춤을 춘다(오른쪽).

이창동 감독의 미학은 해체와는 거리가 멀다. 그는 인간의 타락은 받아들이지만, 가치의 타락은 허용하지 않는다. <박하사탕>의 영호는 첫사랑 순임과의 사랑을 접은 뒤에도 여러번의 기회가 있었다. 사랑이 시시하고 보잘것없을 수 있다고 인정하고서, 군산에서 만난 술집 여자나 아내나 여직원을 구원의 계기로 삼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영호는 고향으로 회귀하는 연어처럼 순임을 다시 만난 뒤 스스로 목숨을 내던졌다. <오아시스>에서도 이 감독은 초심 같은 사랑의(사랑이 항상 초심이 되풀이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순수한 원형질을 그려 보인다. 우화적 과장의 길을 갈 것 같은 지점에서, 힘들게 반대 방향으로 실험해 들어간 게 그로서는 불가항력인 것 같다. 그는 가치를 포기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가치가 과장되는 걸 용인할 수 없는, 리얼리스트인 듯하다. 임범 is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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