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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한 신간`은 아니지만,`베스트 셀러`처럼 <연애소설>
2002-09-11

■ Story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틈틈이 사진찍기를 즐기는 지환(차태현). 손님으로 온 수인(손예진)에게 첫눈에 반한 지환은 용기를 내어 고백하지만 거절당하고 만다. 하지만 수인의 단짝 친구 경희(이은주)와 수인, 지환은 그날 이후 친구로 지내기로 약속한다. 셋이 함께 어울려 다니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중 지환의 관심은 점점 수인보다 경희에게로 기운다. 세 사람이 함께 떠난 여행에서 우연히 키스를 나누게 된 지환과 경희는 사랑과 우정 사이에서 서먹해지고, 어느 날 불쑥 찾아온 경희는 “우린 니가 불편해졌어”라며 셋의 우정 또한 끝났음을 선언한다. 그로부터 5년 뒤. 지환은 발신인 불명의 편지를 받기 시작한다. 이 편지는 어디에서 날아온 걸까? 혹시 그 아이들이 보내는 건 아닐까?

■ Review

마른 손의 한 여자가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편지를 쓴다. 사진 위에 흰 글씨로 짧은 메모를 얹고 정성스럽게 봉한 뒤 상자에 담는다. 여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대신 카메라는 편지의 수취인이 지환이란 남자임을 알린다. 비누향 가득한 편지를 받아든 지환의 기억은 자연스럽게 5년 전으로 넘어간다. 편지는 ‘5년 전 그녀들’과 연관이 있다. 부분적으로 변주되어 있지만 왠지 익숙한 곡의 진행. 바로 이와이 순지의 <러브레터>다. 발신인 불명의 편지를 받은 이가 편지의 소인을 찾아 낯선 고장으로 떠나고 졸업 앨범을 뒤진다. 현재의 이야기가 사건의 단서를 품고 있는 과거의 이야기와 교차한다. 닮은 듯 다른 성격을 가진 두 여자를 사이에 두고 한 남자가 등장하며 그녀를 흠모하는 우체국 직원이 있다. “사랑하긴 했던 걸까?”라고 의심했던 감정들이 추억을 되새김질하는 과정 속에 증명된다. 물론 “오겡끼 데스까” 대신 “같이 낙서하고 싶은 걸 꾹 참고 있는 중이야” 같은 메시지만이 쓰여진 편지이고, 편지의 수취인과 편지를 보냈을 가능성이 없는 망자의 성(性)이 바뀌어 있으며 후반부엔 창의적인 반전이 숨어 있긴 하지만(이 역시 같은 이름을 가진 남녀 ‘후지이 이쓰키’처럼 이름에 의한 반전이기도 하다) 여러모로 <연애소설>은 <러브레터>의 악보에 젖줄을 대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영화의 지휘법은 80년대 스타일에서 머문다. 실족사한 연인의 죽음을 안고 시작하지만 비바체로 경쾌하게 달려가는 <러브레터>의 발걸음에 비해, <연애소설> 전반부터 조마조마하게 드리워져 있는 죽음의 그림자는 20대 초반 아이들의 발걸음을 아다지오로 늘인다. 물론 수인과 경희의 숨겨진 이야기와 앞부분에 친절히 설명되지 않았던 경희와 지환의 마지막 만남에 대한 자초지종이 풀리는 뒷부분은 신선한 반전으로 다가오고, 지환이 늦게 전해진 수인의 편지를 읽는 마지막 장면은 꽤나 눈물샘을 자극하지만 극적 긴장도와 무게가 실린 후반부에 다다르기까지는 다소 밋밋함과 ‘닭살’스러움을 감수해야 한다. 첫 만남. 자전거 추격 끝에 힘겨운 고백을 하지만 거절당한 지환은 옆건물 시계방에서 시계를 빌려 수인과 경희가 앉아 있는 카페의 유리창 밖에 선다. “시간을 한 시간 전으로 돌렸어요. 오늘 내가 한 말 다 잊었으면 좋겠네요.” 시계는 그때부터 한 시간 전이 아니라 <기쁜 우리 젊은 날> 시절로, 그 시절의 정서로 돌아가는 것이다.

전반적으로 문어체가 많은데다 “전 사랑에 빠졌어요. 너무 아파요. 그런데 계속 아프고 싶어요”라는 <일 포스티노>의 대사를 세명의 주인공이 혼잣말처럼 이어서 반복하는 장면은 따뜻하긴 하지만 생뚱맞다. 당연한 수순처럼 이어지는 풍경좋은 곳에서의 ‘즐거웠던 한때’ 역시 마치 2부의 비극을 위한 과장된 행복처럼 보여서 불편하기까지하다. 특히 시대착오적으로 꿈꾸는 듯한 손예진의 대사는 “왜… 하는 일 없이 살만 빠지는 거지?” 같은 몇몇의 진지한 탄식들에서 의도되지 않은 폭소를 유발하기도 하고, 동요대회자세로 무릎을 펴고 구부리고를 반복하며 “내가 찾는 아인 흔히 볼 수 없지∼”를 부르는 장면 등은 연기자의 문제라기보다는 디렉팅의 과실처럼 보인다. 차갑고 여성적인 캐릭터로만 등장했던 이은주에게서 밝고 귀여운 이미지를 발견하는 기쁨도 꽤 크고 연기의 폭과 깊이를 한치씩 늘려가는 차태현의 성장도 대견한데 말이다.

♣ 수인에게 고백하지만 거절당한 지환은 시계를 1시간 거꾸로 돌려 고백은 잊고 친구 사이로 지낼 것을 제안한다. 그런 지환이 귀엽기만 한 경희.♣ "우린 니가 부담스러워졌어." 불쑥 찾아와 이별을 선고하는 경희. 그러나 경희에게는 지환에게 차마 말할 수 없는 아픔이 있다.

결국 착해 보이기도 하고, 거짓말도 안 할 것 같고, 진심까지 충분히 느껴지긴 하는데 부담스러운 올드패션 노총각의 구애처럼 가을의 문턱, 대형 블록버스터와 조폭코미디의 릴레이 속에 달콤하게 관객을 끌어당기는 로맨틱영화 <연애소설>은 ‘베스트셀러’가 될지언정, 그다지 ‘신선한 신간’으로 기억되진 않을 것 같다.백은하 luci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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