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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농사 잘 지었네, <박서방>
2002-10-10

‘페이소스’(pathos)란 단어가 있다. 사전을 찾아보면 동정이나 연민, 가슴시린 비애나 애상을 뜻하는 그리스어 파토스(pathos)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상황에 따라 조금 차이가 있지만 대개 ‘정서적인 호소력’이란 의미로 사용한다. 페이소스는 사실 영화나 연기자를 소재로 한 각종 글에서 거의 관용적으로 쓰이는 표현이다. 좀 심하게 말하면 지금의 페이소스는 글의 윤기와 현학적 향기를 돋우기 위해 ‘조자룡 헌 칼 쓰듯’ 마구잡이로 쓰는 단어이다(솔직히 나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나는 페이소스란 말이 가진 깊은 의미와 생생한 느낌을 오래 전 한 배우의 연기에서 진정으로 느꼈다. 김승호,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연기자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해가 68년이니 30대 후반인 필자가 태어나기 3년 전에 이미 작고했다. 어지간해서는 이제 스크린에서 그의 영화를 접하기 힘든 추억의 스타이다. 자연 그의 영화를 제대로 본 것도 극장이 아닌 10여년 전 명절날 심야의 TV에서였다. 그때 처음 접한 김승호의 영화가 60년에 만든 강대진 감독의 <박서방>(처음 본 것으로만 따지면 70년대 중반 당시 명절날 특선 단골이던 <시집가는 날>(1957)이 있다. 이 작품에서 김승호의 시골 졸부 연기는 탁월하다. 하지만 그 연기에 배어 있는 맛을 제대로 음미하긴 당시 너무 어렸다).

영화 <박서방>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굴뚝 금간 곳이나 부엌 부뚜막을 주로 고치는 박서방이 우여곡절 겪은 끝에 두 딸을 잘 시집보내고 아들은 국비로 해외에 유학가는, 이른바 ‘자식농사’ 제대로 지은 행복한 가정을 이룬다는 내용이다. 스토리라인만 따진다면 이 영화는 그다지 탁월한 편이 못된다. 사건의 얼개도 엉성해 보이고 갈등이 해소되는 방식도 지나치게 상투적이다. 그러나 <박서방>에서 주인공 박서방을 맡은 김승호의 연기는 이런 허술한 이야기의 구멍을 모두 메우고 남는다. 아니, 메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엉성해 보이던 이야기의 상투성이 따스한 온기를 지닌 우리네 이웃의 정겨운 삶으로 바뀌어 다가온다.

김승호의 연기는 세련된 절제미하고는 거리가 멀다. 약간 더듬거리는 대사와 과장된 동선, <웃으면 복이와요>류의 콩트 코미디에서 자주 등장하는 요란한 너털웃음. 좀 둔해 보이기까지 한 큰 체구. 그러나 그런 특징들이 어울리면서 그의 연기에는 50∼60년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꿈과 절망, 아픔이 녹아든다. 그리고 그의 연기에 배어든 시대 정서는 긴 시간의 터울을 넘어 90년대를 사는 나에게도 확실하게 와닿았다. 어떤 배우가 과연 30년이 넘는 시간의 벽을 뚫고 미래의 관객에게 감동을 전해줄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 <박서방> 최고의 장면으로 꼽는 것으로 뒤에 코미디에서 여러 차례 패러디했던 이른바 ‘홍차장면’이 있다. 딸과 결혼하려는 청년의 집을 찾은 박서방. 번듯하게 잘사는 살림에 기가 죽은 그 앞에 청년의 어머니는 티백으로 된 홍차를 내놓는다. 홍차를 구경한 적이 없는 박서방은 식은땀을 흘리다가 홍차 티백을 뜯어 그 내용물을 잔에 턴다. 이런 박서방의 모습을 보며 청년의 어머니는 노골적인 멸시를 나타낸다. 그 집을 나온 뒤 박서방은 술에 취해 울면서 친구 김영감과 딸에게 “나의 무식함이 너의 혼사를 망쳤다”고 한탄한다. 홍차를 보고 쩔쩔매는 연기도 일품이지만, 나중에 자신의 실수로 인해 ‘금이야 옥이야’ 곱게 기른 딸의 인생을 망칠까 안절부절못하는 그의 모습은 지금도 머리에 떠올릴 때마다 콧날 시큰한 진한 감동을 준다.

언제부터인가 영화를 가슴 대신 머리로 보려는 나에게 <박서방>은 일종의 해독제 구실을 한다. 냉소적이고 교활한 영화적 ‘지식’ 대신 삶에 대한 소박한 사랑에 눈물 흘릴 수 있는 ‘심성’을 유지시켜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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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재범/ <스포츠 투데이> 기자oldfield@st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