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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정통 스파이영화의 형식,<본 아이덴티티>
2002-10-15

■ Story

마르세이유 남쪽 지중해에서 조업하던 어선이 한 남자를 발견한다. 등에 두 발의 총상을 입은 남자는 무사히 깨어나지만 자기가 누구인지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유일한 단서는 엉덩이에 심어진 금속에 담긴 스위스 은행의 계좌번호뿐. 은행에 들어가 개인금고를 열어본 그는 자신이 파리에 살고 있는 제이슨 본(맷 데이먼)임을 알게 된다. 그러나 금고의 밑에는 얼굴이 동일하지만 각각 다른 국적과 이름의 여권 5장이 들어 있고, 막대한 현금과 총까지 있다. 제이슨 본은 은행에서 나와 미국 대사관으로 향한다. 그러나 들어서자마자 경비원이 총을 겨누며 꼼짝 말라고 외친다. 순식간에 경비원과 군인들을 제압하고 도망친 본은 대사관에서 우연히 알게 된 마리(프랭카 포텐트)의 차에 타게 된다. 1만 달러에 파리까지 태워주는 조건으로. 파리의 집에 들어가 자신이 누구인지를 찾던 본은 기관총을 들고 난입한 암살자의 공격을 받게 되고 자신의 정체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게 된다. 파리의 경찰은 물론 알 수 없는 조직의 추적을 받게 된 본과 마리는 함께 행동하며 본의 과거를 찾아간다.

■ Review

88년 TV 미니시리즈로 한번 만들어진 적이 있는 <본 아이덴티티>는 제목 그대로,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는 첩보원의 이야기다. 모든 기억을 잃어버리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찾아가는 여정. 하지만 보통의 과거 찾기나 수수께끼 풀이와는 약간 다르다. <본 아이덴티티>는 <토탈 리콜>과 닮았다. <토탈 리콜>의 퀘이드는 자신의 과거를 찾아가다가 끔찍한 사실을 발견한다. 자신은 독재자의 하수인인 하우저였고, 기억을 지운 것은 비밀공작을 수행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퀘이드는 원래 악인이었고, 과거를 찾는다는 것은 다시 악인이 됨을 의미한다. 제이슨 본도 마찬가지다. 본은 자신이 비밀 첩보원임을 눈치챈다.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뭔가 비밀공작을 해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 본을 암살하려다 죽어가는 트레드스톤의 요원은 자신이 그렇게 죽을 운명인 줄 알았다고 토로한다. 철저하게 인간성을 지워버리고, 조직의 명령을 아무런 의문 없이 수행하는 것. 그것이 스파이의 필수 요건이다. 그렇다면 제이슨 본이 과거를 되찾는다는 것은, 그런 비정한 스파이로 돌아가야 함을 말하는 것일까 <토탈 리콜>의 퀘이드는 과거 자신의 의도가 어쨌건 현재의 자기로 살아감을 택한다. 제이슨 본도 마찬가지다. <토탈 리콜>과 다른 점은, 과거의 본에게도 희미하게 인간성이 남아있었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본은 임무에 실패했고, 지중해를 떠돌았고, 기억을 잃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헤매야만 했던 것이다.

냉전이 해체된 이후의 첩보전은 더욱 삭막하다. 회의적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냉전 시대에는 민주주의이건 사회주의이건 수호할 가치가 있었다. 이제는 어디에도 대의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 제이슨 본이 속해 있는 트레드스톤이라는 조직은 유럽 각국에 은거하면서 필요에 따라 암살에서 정보 수집까지 다양한 특별 임무를 수행하는 조직이다. 그건 단지 미국의 국가적 이익 때문이다. 이제는 국가나, 기업이나 아무런 차이가 없어진 것이다. 제이슨 본이 아이덴터티를 찾아가는 과정은 단지 환멸스러운 과거를 폭로하는 과정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것이 아니라, 스파이라는 직업의 정체성을 찾아내고 그것을 부숴버리고 새로운 인간이 되는 과정이다.

<본 아이덴티티>에서 가장 시원한 볼거리는 자동차 추격전이다. 그런데 본이 타고 있는 차는 우습게도 경차인 오스틴 미니다. 작다는 것말고는 아무런 장점도 없는 차를 몰고 경찰의 오토바이와 순찰차를 따돌리는 광경은 호쾌하거나 스릴 넘친다기보다는 아기자기하고 상쾌하다. 파리의 좁은 길을 누비는 경차의 질주는 신선하다. <본 아이덴티티>의 매력은 주로 그런 것이다. 뭔가 화끈하게 시선을 끄는 영상이나 기발한 상상력으로 관객을 빨아들이지 않는다. 어찌 보면 지극히 평범하다. 제이슨이 구사하는 가라데와 킥복싱을 섞어 만든 칼리라는 무술이나 <롤라 런>에서 쉴 새 없이 뛰어다니던 프랭카 포텐트의 이미지도 한눈에 쏙 들어오지 않는다. 하지만 눈여겨보면 범상치 않고, 은근히 깔리는 매력이 있다. 맷 데이먼이 처음으로 선보이는 격투 장면은 대단히 잘 다듬어져 있다. 프랭카 포텐트도 예쁘진 않지만 환하게 웃는 모습은 좋다.

<본 아이덴티티>의 내용이나 형식은 지나칠 정도로 고전적이다. 60년대 유행하던 정통 스파이 영화의 영향이 분명하게 느껴진다. 007의 엔터테인먼트 노선이나 <오스틴 파워>의 패러디, <트리플 엑스>의 익스트림과는 전혀 다르다. 더그 라이먼은 "어릴 적에 이란 콘트라 사건을 보며 자랐다. 내가 접했던 실제의 스파이들은 영화 속의 이미지와는 너무 달랐다"고 말한다. 더그 라이먼이 원한 것은 007의 초기 스타일이나 존 르 카레의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 같은 정통적인 첩보물이었다. 브라이언 드 팔마의 <미션 임파서블>에서 '테크노' 액션만 제외하고 모든 것을 가져온 덕 라이먼은 날렵하게 움직이는 사실적인 스파이 영화를 만들어냈다.김봉석/ 영화평론가 lotusid@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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