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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로니카 사랑의 전설>
2001-04-10

시사실 / 베로니카 사랑의 전설

<글래디에이터>의 막시무스가 장군에서 노예로 전락했다 다시 검투사가 된 풍운아였다면, 얌전한 규수가 고급 매춘부로 변신해 국가대표 로비스트 노릇까지 하고 마녀재판정에 서는 베로니카의 인생 역정도 그에 못잖다. 마거릿 로젠탈의 전기 <정직한 매춘부>를, <가을의 전설>의 제작자 마셜 헤르스코비츠와 감독 에드워드 즈윅이 역할을 맞바꿔 영화화한 <베로니카 사랑의 전설>은, <에버 애프터> <잔다르크>처럼 현대적인 페미니스트 구호로 업데이트된 시대극이며 머천트 아이보리풍 장정의 ‘할리퀸 로맨스’다.

‘거래’에 가까운 결혼 풍속에 연인을 빼앗긴 베로니카는 수녀와 창녀의 갈림길에서 후자를 택한다. 정숙한 여인의 훈장과 바꾼 자유로운 펜과 육체로 그녀는 종이 위에, 침대시트 위에 시를 쓴다. 한 남자가 아닌 사랑 자체를 사랑할 것. 정신으로 유혹할 것. 남자가 가장 부끄러워하는 흉한 상처에 입맞출 것. 자기가 유일한 남자라고 믿게 할 것. 내 여자가 됐다고 믿을 때 돌아설 것. 베로니카가 훈련받는 실용적인 사랑의 기술들은 이 영화에서 가장 재미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페리클레스의 애첩이 그랬듯 세상을 움직이는 남자들을 움직이는 힘을 쥔 베로니카는 질투하는 애인에게 따진다. “가정을 위해 아내와 자면서, 조국을 위한 이번 일은 용서 못해요?”

최소한 <베로니카…>는 솔깃한 스토리와 볼거리를 주는 영화다. 곤돌라에 비스듬히 누운 꽃다발 같은 처녀들은 아름답고, 연애에 관한 잠언은 유익하며, 여성의 주체성과 종교적 불관용을 건드린 테마는 흥미롭다. 그러나 감독은 베로니카만큼 용감하지 못했다. 주말연속극풍의 앞이 보이는 기승전결을 시종 같은 리듬으로 풀어내는 지나치게 경제적인 연출은 우아한 코스튬 드라마의 희롱에 취할 시간도, 시적인 대사를 음미할 여유도 관객에게 배려하지 않는다. <인 앤 아웃>의 결말을 옮겨놓은 듯한 반전도 흥을 깬다. <베로니카…>는 자기가 선택한 장르를 진심으로 애무하지 않는, 장르와의 정략 결혼 같은 영화다.

김혜리 기자 verme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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