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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점이 있나요, <온리 유>
2002-10-17

스물아홉의 가을이 소리없이 찾아왔다. 그리고 올 가을도 어김없이 청첩장이 하나둘씩 책상 위에 쌓이고 있다. 올해부터는 유난히 후배들의 청첩장이 많아짐을 느낀다. 오늘도 엄마는 어느 집 아들 얘기를 꺼내신다. 이럴 땐 그저 영화나 한편 보면서 한곳에 집중하는 것이 최곤데….

지금까지 한 서른번은 족히 보았을 영화. 오늘도 난 결국 그 비디오를 집어든다. 낭만의 공간 베니스를 배경으로 운명의 끈을 밀고 당기는 사랑 이야기, <온리 유>. 어릴 적 놀이동산 점쟁이에게 운명의 이름을 듣게 된 여주인공, 페이스. 그녀는 오랜 세월 동안 조금의 의심도 없이 그 운명의 이름을 믿어왔고, 또 그 운명의 사람을 기다린 로맨티스트였다. 그리고 그녀에게 첫눈에 반해버려 그 운명의 이름을 뺏어버린 귀여운 거짓말쟁이, 피터. 둘의 만남은 이렇듯 이름 하나 때문에 이어지긴 했지만, 어쩌면 두 주인공은 더 큰 운명의 힘으로 머나먼 이국에서 서로를 발견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만약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운명의 이름을 알고 있다면, 아니 신체적인 특징이라도 알고 있다면

내겐 오른쪽 손목에 붉은 점이 있다. 크기도 꽤 커서 누구나 어릴 적 개한테 물린 자국이 아니냐고 물을 정도다. 어릴 때는 그렇게 도드라지지 않았는데 나이가 들면서 이 점도 조금씩 커졌고, 사람들과 처음 만나면 언제나 첫 질문이 “그건 뭐예요”였다. 그리고 난 그 질문에 답하는 것에 점점 지쳐갔다. 한번은 소개팅에서 만난 남자가 금속에 예민한 피부에 나타나는 피부병의 일종이라면서 연고를 선물해준 적도 있었다. 그때의 당혹스러움이란….

하지만 어릴 적 나는 ‘붉은 점’을 내 반쪽과 내가 공유하는 인연의 징표라고 생각했었다. 성년이 된 어느 날, 난 우연히 거리에서 한 남자를 스치듯 지나간다. 우린 숙명처럼 서로를 느끼고, 서로의 점을 알아보는 것이다. 이렇게 우린 첫눈에 서로가 짝임을 알게 되고, 서로의 점을 확인하며 지나온 시간을 이야기한다. 그리곤 동화 속 주인공처럼 영원히, 행복하게, 그리고 웃음꽃을 피워가며 남부러워할 것 없이 사는 것이다. 이게 바로 내가 상상해왔던 운명의 시나리오였다.

그리고 어느덧 스물아홉해가 지나갔다. 난 그 세월 동안 딱 세명의 붉은 점을 갖고 있는 남자들을 만났다. 한명은 목 뒤에, 한명은 발바닥에. 그리고 한명은…제대로 기억도 나질 않는다. 그때마다 나는 그들이 나의 인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른 사람들에게보다 더 쉽게 마음의 문을 열어주었다. 그러나 지금. 난 그중 어느 한 사람과도 함께이지 않다. 그리고보면, 나의 붉은 점은 아마 그냥 점일 뿐인가보다. 인연의 징표, 운명의 상징도 아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간단히 레이저로 지지직 태워 없애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적어도 내겐 지금 이 순간에도 내 반쪽과 나를 연결시켜주는 인연의 끈이라고 믿고 있음으로….

요즘 들어, 부쩍 점을 보고 싶어진다. 왠지 그곳에 가면 내 짝에 대한 속시원한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만 같다. 영화 속에서처럼 이름 석자를 얘기해주진 않겠지만, 적어도 성은 알려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기대에서 말이다. 아니 그렇게 큰 욕심을 부리지도 않는다. 그저 키는 큰지, 작은지, 아니면 나이는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이런 거라도 알 수 있다면 어마나 좋을까

하긴 이름을 안다 해도 달라질 것은 하나도 없다. 내가 원하는 운명의 이름을 갖고 있는 사람을 만났다고 한들, 아니 붉은 점을 여러 개 갖고 있는 사람을 만난다고 한들, 내가 과연 그 사람의 모든 면을 사랑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래, 난 영화 속의 페이스처럼 이름 하나만 보고 달려갈 수 있는 그런 용기있는 사람은 분명 아니다. 결국 나는 내가 선택한 이 고독을 불평없이 즐기는 수밖에…. 하지만 난 여전히 고대한다. 나만의, 나만을 위한 ‘온리 유’가 언젠가 내 눈앞에 나타나주길 말이다. 주변에 붉은 점이 있는 분이 있다면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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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지승현/ KBS 아나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