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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빈치, 게임에 뛰어들다
2001-04-12

<클라이브 바커의 언다잉>

지금은 천재가 살기에 적당한 시대가 아니다. 뭐든 자급자족해야 했던 시절과는 달리 현대는 ‘만능 재주꾼’(handyman)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분업 시스템은 꼭 공장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다. 학문이나 예술도 철저히 분업화하고 단편화해 있다. 모르긴 몰라도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다시 태어난다면 명문 대학원에 진학하거나 억대 연봉을 주는 직장에 취직하기가 만만치 않을 것이다. 모든 장르는 자기만의 문법을 가지고 있고, 이 문법을 익히는 데만 평생을 바쳐야 한다. 하지만 가끔은 살아남은 재주꾼들이 있다. 클라이브 바커는 그중 한명이다. 그는 국내에서는 호러영화 감독이나 제작자로만 알려져 있다. 사디즘과 공포가 엮어내는 에로티즘의 세계를 그린 영화 <헬레이저>를 비롯해 많은 영화를 감독하고 제작했으며 극본도 썼다. 하지만 그는 소설가로도 유명하다. 대표작인 <피의 책> 시리즈는 장르문학의 한계를 뛰어넘는 성취를 이루었다고 평가받고 있는데, 스티븐 킹으로부터 ‘호러의 미래’라는 상찬을 받기도 했다. 그의 소설은 단순히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공포를 끌어올리는 걸 넘어 ‘공포’의 의미를 되새기며 상상력만이 만들 수 있는 비전을 보여준다. 바커는 호러뿐 아니라 판타지 소설도 썼는데, ‘쓰기 전에 계약하는’ 얼마 안 되는 작가 명단에 당당히 이름을 올려놓고 있다. 이 정도만 해도 평범한 사람들을 울컥하게 만들기 충분하다. 하지만 영화와 소설뿐 아니라 그림에도 손을 대어 역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가 게임에 관심을 가진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첫 번째 게임인 <나이트브리드>에서 그가 한 역할은 자신의 작품을 원작으로 제공한 것뿐이었고, 게임 역시 영화의 유명세에 힘입어 성공해 보자는 조금은 수준이 떨어지는 기획 게임에 불과했다.이번에 출시된 <클라이브 바커의 언다잉>은 클라이브 바커의 이름을 내걸어도 부끄럽지 않은 첫 번째 게임이다. 바커가 출중한 소설가에 감독에 화가이긴 하지만 게임 전문가는 아니다. 하지만 제작 전 과정 내내 제작자들과 함께 앉아 있었다. 캐릭터 디자인에 대해 이야기하고, 주인공의 모습을 결정하고, 게임에 등장하는 캐릭터의 성격에 대해 설명하면서 자신의 이야기가 게임에서 살아날 수 있도록 수많은 제안을 했다. 그러니까 ‘게임 기획 컨설턴트’라고 부를 만한 역할을 한 셈이다. 게임세계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진 통일성, 또 캐릭터 한명 한명의 성격이 일기장이나 연출된 대사들을 통해서 생생하게 드러난 건 그가 제작에 참여한 덕분이다. 뿐만 아니라 내레이션을 맡아 게임 전체의 분위기를 이끈 것 역시 그의 목소리다. 주인공 얼굴도 어딘지 바커 자신과 닮은 데가 많다. 누구나 알다시피, 아무개의 어쩌구란 타이틀을 달았을 경우 게임이든 영화든 제대로 된 경우가 별로 없다. 하지만 <클라이브 바커의 언다잉>은 높은 완성도를 지닌 게임이다. 일인칭 슈팅답지 않게 화끈한 액션은 부족하지만, 잘 만든 호러영화 한편을 보는 것 같은 깊이있는 공포를 제공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인간의 지평을 넓히기 위한 수많은 창조를 이루는 데 전념했다. 그는 일종의 계몽주의자였다. 500년 지난 지금 클라이브 바커는 인간에게 도움이 될 새로운 가치와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 그는 밝은 미래를 위해 나아가는 대신 우리 속에 감춰진 어둠과 공포를 드러내는 데 열중한다.

박상우/ 게임평론가 sugulman@chollian.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