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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로즈 호텔
2002-10-31

예견된 파국

New Rose Hotel 1998년, 감독 아벨 페라라 출연 크리스토퍼 워컨, 윌렘 데포, 아시아 아르젠토, 아나벨라 시오라, 존 루리 장르 SF (우성)

아벨 페라라의 영화는 어둡다. 아니 암울하다고 말하는 게 더 좋을 것 같다. 그냥 ‘어둡다’ 정도로는, 아벨 페라라 영화의 도저한 절망과 출구없음의 세계가 그려지지 않는다. 어둡고, 침울하고, 비관적이고 등등 부정적인 의미의 단어들이 산처럼 쌓였을 때에 비로소, 균형이 맞는다. <퓨너럴>에서 크리스 펜이 부르는 애절한 블루스처럼, 죽음과 벗한 인간들만이 그려낼 수 있는 ‘현실’의 묵시록이다.

사이버펑크의 창시자로 알려진 윌리엄 깁슨의 단편을 각색한 <뉴 로즈 호텔>에서도 아벨 페라라의 일관성은 관철된다. 정보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근미래. 폭스(크리스토퍼 워컨)는 마스 기업의 과학자 히로시를 빼돌릴 계획을 세운다. 엑스(윌렘 데포)와 만나던 클럽 종업원 샌디(아시아 아르젠토)를 본 폭스는 한 가지 제안을 한다. 히로시를 유혹하여 데리고 오면 100만달러를 주겠다고. 폭스는 히로시를 마스의 라이벌인 호사카에 1억달러에 팔 생각이다. 폭스와 엑스의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히로시를 모로코로 빼돌리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계획은 엉뚱한 데에서 어그러진다. DNA를 조작한 바이러스가 유포되어 히로시를 비롯한 호사카의 과학자들이 몰살당하고, 폭스는 마스의 청부인들에게 쫓긴다.

<뉴 로즈 호텔>은 액션도 없고, 스릴도 없다. SF임을 알 수 있는 근거는 <블레이드 러너>의 풍경을 모사한 듯한 황량한 도시의 전경과 과학적인 설정이 드러나는 대사뿐이다. 히로시를 유인하는 극적인 상황에 집중하지도 않는다. 모니터에 비친 몇개의 장면과 상황 보고만으로 사건이 이루어진다. 아벨 페라라는 액션이나 스릴 따위의 감각적인 쾌락에는 일체 관심이 없다. 아벨 페라라의 관심은 전혀 이루어질 수 없는 욕망을 꿈꾸는 폭스와 엑스의 내면의 목소리를 따라가는 것이다. 불안하고, 이미 모든 것을 빼앗긴 채 복수를 꿈꾸는 폭스. 그의 내면은 텅 비어 있고, 결국 개같이 비참하게 죽어간다. 사랑을 믿지 않았던, 그러나 사랑을 하게 된 엑스는 그 사랑에 배신당해 굴욕을 맛본다. 하지만 ‘사랑에 빠지지 않고 사랑을’이라고 노래하던 샌디를 내몬 것은 엑스였다. 함께 도망쳐 결혼하자던 샌디의 소원을 간곡하게 물리친 것은 엑스였다. 함께 도망쳐도 그들의 미래에는 죽음뿐이었겠지만, 어쨌든 연인들은 서로를 배신한 것이다. 퇴폐적인 미모의 아시아 아르젠토가 연기하는 샌디와 사랑에 빠졌다면, 그런 파국 정도는 엑스도 예감은 하고 있었을 것이다. 페라라의 세상이 언제나 그렇듯이.김봉석/ 영화평론가 lotusid@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