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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과의 심리전,<스토커>
2002-12-03

■ Story

쇼핑몰 한구석에 자리한 사진 코너에서 일하는 싸이는 가족이 없는 외로운 사람이다. 그는 수년간 제이크 가족의 사진을 현상해주며 그들을 실제 가족으로 상상하며 살고 있다. 제이크에 대한 애정이 깊어질수록 싸이는 실제로 자신이 정말 그들 가족의 일부라고 여기면서 병적으로 제이크에게 집착하게 된다. 제이크 가족의 사진을 모으기 위해 사용한 회사자금이 빌미가 되어 싸이는 회사에서 해고당한다. 또한 그는 마야 버슨과 제이크의 아버지 윌 욜킨이 불륜관계임을 알게 된다. 싸이는 ‘가족으로서’ 격분하게 되고, 점점 더 집요하게 이들 가족 일에 관여한다.

■ Review

일단 ‘싸이’가 되기 위해 로빈 윌리엄스의 외양은 많이 바뀌어야 했다. 심약함을 보여주기 위해 머리는 힘없는 노란색으로 염색하고, 정숙함을 보여주기 위해 옷은 민무늬의 점퍼와 바지차림으로 갈아입는다. 그 얌전한 무채색 의복 위에 걸쳐져 있는 유치찬란한 원색의 하늘색 가방이 무언가 균형잡혀 있지 않은 내성을 암시한다. 그 어수룩한 변장에 친절한 미소는 필수일 것이다. 왜 어렸을 때부터 왕따였으며, 지금에 이르러 가정은 없고, 회사에서는 지나칠 정도로 완벽함을 따지는 고리타분한 점원이며, 한편으론 언제나 유순하게 사람들을 대하는 싸이는 전형적인 약골이다. 그렇지만 그 소심함과 유약함, 친절함은 언제라도 미쳐 날뛸 수 있는 사이코의 기본 조건이기도 하다. 그 모든 사이코들 중에 진짜 사이코는 역시 앤서니 퍼킨스이듯이, 모든 면이 지나칠 정도로 약화되어 있을 때 터져나오는 광증은 몇 갑절의 스산함을 던져줄 것이므로.

그런 싸이는 알고 보면 외롭고 불쌍한 사람이다. 아내가 없는 그는 자식도 없다. 이것이 그가 가장 원하고 있는 것이면서 동시에 도저히 채워넣을 수 없는 결핍이다. 억지로라도 그것을 채워넣기 위해 싸이는 제이크 가족의 사진들을 방안 가득히 붙여놓고 가짜 가족의 완성을 꿈꾼다. 그의 욕망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욜킨의 아름다운 아내가 아니다. 성애의 욕망이 없기 때문에 <스토커>는 변태성욕자의 침흘림이 되지 않는다. 또한 그들이 가진 풍족한 재산도 싸이가 부러워하는 대상이 아니다. 때문에 침입하여 훔치려 드는 것이 없다. 한 차례 환상을 통해 제이크 가족의 집에 몰래 숨어들어가지만, 그의 입장에서 이것은 침입이라기보다는 방문이라고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다. 싸이가 원하는 것은 바로 그들 자체이다. 좀더 구체적으로는 몇년간이나 사진으로 지켜봐온 귀여운 소년 제이크이다. 싸이는 그들의 일원이 되고 싶어한다. 그런데 궁금한 것이 생기기 시작한다. 가족이 되고 싶어한다고 그럼 가족 중 누가 되고 싶은 것일까 어떤 역할을 맡고 싶어하는 것일까 제이크와의 관계에서 무엇이 되고 싶어하고 있는 것일까 아버지의 자리를 갖고 싶어하는 것일 거라고 손쉽게 판단할 수 있다. 하지만 싸이가 제이크의 아버지를 꿈꾸는 것이라면 실제 제이크의 아버지인 욜킨은 진작부터 시체가 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 순간 그는 들으란 듯이 스스로를 가리켜 당당하게 ‘삼촌’이라고 제시한다. 말하자면 그가 제이크 가족의 일원이 되기를 소망한다는 것은 지금의 그들이 지닌 행복을 망가뜨리지 않는 한에서 고스란히 그 안에 덧붙여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만약 제이크의 아버지 욜킨이 아내 몰래 다른 여자를 만난다는 사실을 싸이가 알지 못했더라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테지만, 그 사실을 안 이상 삼촌은 참을 길이 없다. 그렇게 행복한 가정을 갖고 있는 사람이 아내 몰래 다른 여자를 만나다니!

여기서부터 이 영화는 조금씩 망설이기 시작하는데, 아니면 조금씩 분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는데, 이 정도로는 싸이가 미쳐야 할 명분이 별로 세워지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이다. 삼촌이라는 모호한 위치를 상상적으로 지정하여 그 환상안으로 들어간 뒤에 싸이가 필사적으로 대응하는 방식이 왜 상상적 가족의 안정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불륜의 사진을 니나에게 보여주는 것으로 대치되어야 하는 것일까 그걸 보여준다는 것은 이 가정을 깨어버리겠다는, 혹은 제이크의 아버지 욜킨이 없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는 그러니까 처음 생각했던 대로 아버지가 되고 싶어하는 것일 수도 있다. 목적으로 둔 장르의 구획이 영화 내부의 서사를 뒤집으면서 모호한 삼촌의 위치만큼 모호한 동기들을 연접시킨다.

이제 착한 삼촌을 무서운 사이코로 돌변시키기 위해서 영화가 깔아놓는 설정은 두 가지다. 자신을 해고한 회사 매니저에게 그의 딸을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협박하는 것과 호텔에 있는 욜킨을 위협하여 불륜장면을 사진에 담는 것. ‘사진’이 있다. 욜킨이 불륜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도 사진이다. 욜킨의 아내에게 그 사실을 전달하는 방식도 사진이다. 그러므로 사진은 그에게 무척 중요한 것인데, 단지 그에게뿐만 아니라 영화에도 중요한 것이다. 사진은 “여기에 있었다”라는 의미를 지시하는 것이라고 싸이가 말할 때, 그 협박의 방식은 바르트식으로 최대의 효과를 낳는다. 사진들이 지시하는 바는 다름 아니라 ‘거기에 있었음’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왼쪽부터 차례로)♣ 싸이는 전형적인 약골이지만 그의 집착은 광기를 띤다. 직장에서 해고되자 싸이의 억눌린 내면은 폭발 직전에 이른다. ♣싸이는 사진속에 존재하는 이상적 가족에 직찹한다. 싸이는 기꺼이 제이크의 삼촌이 되려하는 동시에 제이크의 아버지가 되려 한다.

또, 사진을 통해 모든 서사의 지도를 싸이 혼자 쥐게 된다. 그러니 이 영화는 무서운 외부인이 설정되어 있거나 그를 피해 도망다니는 한 가족의 공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도 않다. 가족과 외부인 사이의 긴장감으로 도배되지도 않는다. 오로지 영화 내에서 누구보다도 많이 알고 있는 싸이와 또 그를 주시하고 있는 관객과의 심리전이 되어간다. 싸이는 결국 스릴있게 미쳐야 하고, 우리는 그를 보며 도대체 언제 미쳐버릴 것이냐고 소리친다. 수수께끼로 싸여 있는 의혹의 파헤침이 아니라 모든 긴장의 빌미를 미리 내어주고 벌이는 이 내기에서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도 역시 싸이이다. 결과적으로 <스토커>는 로빈 윌리엄스의 일인극인 셈인데, 거기에는 삼촌과 아버지 사이의 모호한 자리잡기가 있고, 사진을 매개로 한 협박과 교훈의 긴장이 있다.정사헌/ 영화평론가 taogi@freech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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