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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직비디오계의 스타감독 차은택의 모든 것 <2>
2002-12-07

젊은 피,감성은 언제나 목마르다

<와호장룡>의 장첸이 김현주, 이범수와 주연한 <벌써 1년>은 복서인 두 남자와 그들의 매니저 역인 김현주의 삼각관계를 축으로 한다. 이범수가 경기에서 비참하게 패하고 사라진 자리에 새로 들어온 복서 장첸과 그를 보면서 이범수의 그림자를 지우지 못하는 김현주. 로드웍을 하고,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서로 다가갈 듯 다가가지 못하는 두 남녀의 미묘한 심리전은 미완으로 남았지만, 곧 발매될 브라운 아이즈의 2집 <점점>의 뮤직비디오로 이어질 예정이다. 왁스의 <화장을 고치고>는 우발적으로 사람을 죽인 신은경과 그 대신 감옥에 간 김영호의 기다림을 담은 뮤직비디오. “내가 만든 뮤직비디오를 쫙 늘어놓고 보면, 정말 보편적인 스토리다. 어디선가 본 듯한 이미지”라는 그의 말대로, 다수의 ‘드라마타이즈 뮤직비디오’는 어디선가 읽거나 들은 듯한 내러티브를 갖고 있다.

“박명천 같은 감독은 지금도 늘 새로운 것을 좋아하고, 대중을 놓고 타협하려고 하지 않는다. 새로운 것을 던져서 좋아하려면 좋아하고, 아니면 아니라는 건데, 그걸 보면서 자극을 많이 받는다. 그가 어떤 이미지나 트렌드에서 제일 처음이 되고 싶어하는 욕심이 있다면, 난 반대로 그 트렌드 안에서 가장 잘 쫓아가려는 사람이다.” 조성모의 데뷔곡 <To Heaven> 이후 부쩍 늘어난 드라마타이즈 뮤직비디오가 종종 사고나 불치병으로 연인들 중 하나가 죽으면서 완결되는 식의 극단적인 구성 일색으로 진부하고 식상하다는 비판을 들은 지는 이미 오래. “안 죽어도, 사건사고가 나지 않아도 되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 실제 남과 여가 처음 만나는 장면을 몰래카메라로 찍으면 정말 심심할테니까.” 막상 그렇게 ‘심심하게’쓰다가도, 음악이 고조되는 부분에서는 “차에 치여야 되고, 눈물이 떨어져야 되고, 뭔가 해프닝을 만들어줘야 한다”는 강박의 자장으로 끌려드는 때도 있다. “대중이 좋아하는 게 뭘까”라는 고민의 산물이다. 그래서 차은택의 뮤직비디오 중에도 자신의 연인을 권상우에게 부탁하고 간 정준호가, 그녀를 지켜주려고 주위를 맴도는 권상우를 오해하고 찔러죽인다는 조성모의 <Ace of Sorrow>처럼 극단적인 경우가 없진 않다. 하지만 그렇게 익숙하고 신파스러운 드라마를 꾸밀 때조차 디테일을 고민한 흔적은 단연 돋보인다.

선호 감독 NO.1

그러는 사이에 차은택은 가수들이 가장 선호하는 감독이자 “욕도 많이 먹고, 하는 것보다 떨어져나가는 일이 더 많은” 감독이 되어버렸다. 노래하고 춤추는 가수의 이미지나 찍어서 립싱크를 하는 식의 뮤직비디오에는 원체 매력을 못 느끼는데다가, 시놉시스를 오래 쓰는 편이기 때문. “이야기를 만들고, 단편영화처럼 찍는 게 좋다”는 그는, 음악을 받아들면 2∼3주씩 연락을 두절하고 “잠수를 타기” 일쑤다. 혼자 불꺼진 방에서, 집에 들어가기 전 주차장에서, 이따금 새벽에 남산 수산로를 차로 왔다갔다 하면서, 수도 없이 같은 음악을 듣는다. 도입부를 들으면 시나리오가 잘 떠오르는 편이라, 수십번씩 도입부만 반복해 듣기도 한다. “글을 보면 한줄한줄 그림을 만들어가며 읽는” 편이라 남들 하루 읽을 것을 며칠씩 붙잡고 읽는데다, “그림이 안 짜여지고 걸리는 건 따지고 들어서 작가들이 별로 안 좋아한다”. 김영찬 작가와 함께 한 <화장을 고치고> 등 2편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놉시스를 직접 쓰게 된 것도, 그런 고집 때문이다. 하긴, 그 재미에 뮤직비디오를 한다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뮤직비디오,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스토리텔링이 아니라면, 드라마타이즈가 없어진다면, 뮤직비디오를 하고 싶지 않을 것 같다”고까지 말하는 만큼, ‘드라마타이즈 뮤직비디오’의 새로운 시도에 대한 고민도 많다. 예컨대 골목길에서 맞부딪친 소년, 소녀가 우연한 만남을 거듭하면서 서로의 설렘을 키워가지만 소년은 병으로 죽어간다는 신승훈의 <사랑해도 헤어질 수 있다면>는 전형적인 감상적 멜로다. 소년을 위해 집 앞 앙상한 나무에 가득 새 잎을 달아놓고 눈 속에 잠든 소녀의 사연도 별 다를 게 없다. 하지만 초생달 눈을 하고 웃거나 단순한 동그라미 같은 눈에서 굵다란 물방울을 흘리는 인형들의 연기는 색다른 질감을 낸다. 표정과 동작이 한정되고 절제된 인형들의 말없는 멜로드라마가, 슬픈 음색의 발라드와 미묘한 대구를 이루는 것이다. <지젤>에서 영감을 얻은 발레로 드라마를 구성한 박효신의 <좋은 사람>도, ‘드라마타이즈’의 다양한 변주를 시도하는 과정에 있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사실 뮤직비디오 작업에선 돈을 벌기보다, 제 주머니를 털어야 하는 일이 종종 일어난다. 국내 음반시장 규모가 크지 않은 만큼 뮤직비디오 예산에도 한계가 있다. 시장 대비 적정예산은 대략 1억∼1억5천만원선. <사랑해도…>는 제대로 찍었다면 7억∼8억원 규모였겠지만, 직접 개발한 캐릭터 캐발비 등 자체 인건비는 빼고, 스튜디오 비용을 아끼고자 비어 있는 주택을 빌려 안방과 거실에서 2대의 카메라를 돌려가며 한달 만에 촬영한 결과 1억5천만원선에서 제작한 경우다. 대신 “감독에게 태클 들어오는 게 없어서” 무협, 액션, 스릴러, 멜로를 맘껏 해볼 수 있다는 게 뮤직비디오의 장점이란다.

그는 영화에 대한 관심과 자신감도 크다. 올 초 그는 캐스팅까지 갔다가 끝내고 만 경험이 전부지만, 대중의 심리를 읽어야 하는 광고와 뮤직비디오를 계속 해온 만큼 관객이 어떤 영화를 좋아할지“감잡고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그의 바람은 소박한 편이다. “터뜨릴 수 있는” 작품을 하자는 제안도 심심찮게 들어오지만, “대중이 좋아하고 평단에서 욕은 안 먹는 정도”의 영화를 하고 싶다는 것. 아직은 뮤직비디오들이 그를 놓아주지 않으려 하는 것 같다. <The Name> 때 양조위와 얘기했던 시놉시스를 12월까지 써보내야 하고, 순제작비 5억원 정도의 저예산으로 <집으로…> 같은 느낌의 특이한 멜로를 해보고 싶은 계획도 줄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