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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직비디오계의 스타감독 차은택의 모든 것 <1>
2002-12-07

젊은 피,감성은 언제나 목마르다

어느 처마 밑에서 짤랑이는 풍경 소리, 자줏빛 꽃 화분을 든 손에서 힘없이 걸음을 옮기는 발로 미끄러지는 카메라. 낮은 담 옆을 걸으며 집안을 들여다보는 소년의 눈에 툇마루의 고무신이 들어온다. 고무신의 주인인 소녀가 자줏빛 꽃잎을 띄운 목욕물에 몸을 담그고, 화사한 예복으로 갈아입으며 내키지 않는 혼례를 준비하는 동안, 소년은 안타깝게 입술을 깨물 뿐. 혼례 행렬과 가마 안의 소녀, 그뒤를 쫓는 소년의 모습이 교차되는 영상 위로, “못된 못된 나를 잊어주기를” 하는 연인들의 애잔한 이별사가 흐른다. 결국 신방 앞에 놓인 소녀의 고무신이 비에 젖지 않도록 연잎을 덮어주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던 소년의 사랑 이야기, 이승환의 뮤직비디오 <당부>다.

99년에 발표된 이승환의 <당부>는 지난 4∼5년 사이 국내 뮤직비디오의 주류로 자리잡은 ‘드라마타이즈(dramatize) 뮤직비디오’의 한 정점으로 기억될 법한 작품. 중국 전통 음악풍의 선율에 어울리는 시대극의 고풍스러운 분위기와 동양적인 색감, 세심한 디테일이 뒷받침된 인물들의 감정 연출은, 완성도 높은 한편의 단편영화를 보는 듯하다. 이 뮤직비디오는 이승환의 신보에 눈길을 모으는 데 견인차 역할을 했고, m.net 뮤직비디오 페스티벌, 한국영상음반대상 등 그해 뮤직비디오 관련 트로피를 독식하다시피 했다. <당부>를 연출한 차은택은, 서정적인 드라마타이즈 뮤직비디오의 대명사로 알려진 스타감독. 왁스의 <화장을 고치고>, 브라운 아이즈의 <벌써 1년> 등 ‘얼굴 없는 가수’로 불리며 뮤직비디오로 먼저 알려진 대형 신인들 뒤에는, 그들의 음악에서 애틋하고 세련된 멜로드라마의 영상을 끌어냈던 차은택이 있었다.

CF계가 먼저 알아봤다

올 한해 동안 찍은 뮤직비디오만 해도 전지현, 정우성이 각각 범죄자와 경찰로 길이 엇갈린 경찰대 동창생으로 분한 유미의 <사랑은 언제나 목마르다>, 양조위, 전도연, 류승범이 밑바닥 소매치기 인생으로 등장한 더 네임의 <The Name> 등 화려한 출연진과 함께한 굵직한 작품들을 포함해 모두 8편. 그중 6편이 지난 11월29일에 열린 ‘2002 m.net 뮤직비디오 페스티벌’ 수상 후보에 올랐고, <사랑은 언제나 목마르다>가 여성신인 부문, 자두의 <대화가 필요해>가 혼성그룹 부문, 클레이애니메이션을 시도한 신승훈의 <사랑해도 헤어질 수 있다면>이 전문심사위원특별상을 수상한데다가 감독상까지 지난해에 이어 차은택에게 돌아가면서 새삼 뮤직비디오의 스타감독으로서의 입지를 확인했다.

지금은 뮤직비디오로 더 널리 알려졌지만, 사실 차은택은 광고계에서 손꼽히는 CF 감독이다. 88학번으로 시각디자인을 전공한 그는 원래 일러스트레이터 지망생이었다. 재학 시절 뉴욕에서 열린 젊은 작가들의 전시회에 초청될 만큼 일러스트레이터로 “잘될 뻔도 했”지만, 제대 뒤 복학하기까지의 휴식기 동안 아르바이트 삼아 광고 프로덕션에 나가면서 뜻밖의 길로 들어섰다. 별다른 일없이 여기저기 기웃대는 게 심심해서 프로덕션의 조감독 형을 졸라 편집기 사용법을 배웠는데, 다양한 외국 광고를 보는 재미에 푹 빠진 것. 좋아하는 광고를 모아 멋대로 편집도 하고, 음악도 깔아보던 그 재미가 그를 광고로 이끌었다. 졸업 뒤에는 코래드의 자체 제작 프로덕션인 한국비젼을 거쳐 영상인 프로덕션에 들어갔고, 그곳에서 친구가 된 박명천 감독과 함께 조감독으로 일하며 본격적으로 광고에 뛰어들었다.

광고를 시작했을 때만 해도 그의 관심사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98년 홍콩에서 ‘드비어스 다이아몬드-world wide편’을 촬영할 때는, 방으로 걸어 들어와 의자에 앉는 모델 설수진의 몸라인이 내심 그려본 X자 구도에 맞지 않는다고 몇 차례 다시 찍었을 정도. ‘라노스-안정환 편’을 찍을 때까지도 어떤 구도가 좋은지, 뒤에 배경이 어떤지, 한컷 한컷 그림을 생각하기 바빴다. “지금 찍는다면 모델의 감정도 좀 잡고, 캐릭터를 살렸을 것”이라며 배경이나 장치를 보는 눈은 하나의 장기로 남겨두겠다는 그는, 인물과 감정이 보이는 이야기를 재차 강조한다. 동국대 대학원 연극영화과에 진학하면서 연출을 공부하고, 부부생활에 권태를 느끼며 하수구를 통해 들리는 소리에 중독되는 남자에 대한 단편영화 <하수구>를 찍어본 경험도 이에 일조했다.

출발은 우연에 가까웠지만, 이같은 이야기의 매력이야말로 차은택이 거듭 뮤직비디오를 찍게 되는 이유. 아직도 촬영하던 날의 영하 18도 혹한이 생생하다는 첫 뮤직비디오는 97년에 찍은 이민규의 <아가씨>다. 아마추어 합창단의 지휘자로 종교음악을 계속해온 아버지 휘하 그의 집안은 독실한 기독교인데, 영상인에서 조감독을 하던 시절 교회에 가서 ‘저도 감독 시켜주세요’ 기도하고 나올 때 전화가 왔다. 불과 하루 만에 몇백만원의 제작비로 찍은 <아가씨>는 고생스러운 기억이지만, 그 코믹함을 마음에 들어했던 이승환과 만나게 된 소중한 계기이기도 하다. 이승환은 콘서트 때 틀 만한 짧은 코믹버전의 영상물을 만들어달라고 했고, 차은택은 알고보니 휘문고 선배였던 그에게 <애원>도 찍고 싶다고 청했다. 지하철을 무대로 한 <애원>은, 필름에 찍힌 정체불명의 그림자 때문에 귀신 소동으로 떠들썩하게 매체를 장식했던 뮤직비디오. 관심을 끌기 위해 일부러 조작했다는 설이 돌아 이승환은 오해받곤 살 수 없다며 은퇴까지 생각할 만큼 속상해했고, 초짜 감독이었던 차은택은 엉뚱한 유명세를 타게 된 해프닝이었다. 그뒤로 <그대는 모릅니다> <그대가 그대를> <당부> 등 이승환과 계속 작업해오면서, <애원> 때의 미안함을 갚을 순 있었지만.

"사는게 멜로 같다"

특히 만남과 헤어짐의 애틋한 정서가 풍부한 이승환의 발라드는 멜로드라마가 주축을 이루는 차은택의 뮤직비디오와 잘 어울리는 한쌍이다.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연인에 대한 갈망을 담은 <그대는 모릅니다>는 마네킹을 사랑하는 소녀를, 미묘한 여운을 남기는 <그대가 그대를>의 제목은 자신을 구해준 일본 여인을 사랑하게 되지만 배신당하고 마는 항일 독립투사의 이야기를 담은 영상을 통해 더 간절하고, 더 애절한 울림을 갖게 되니까. 이승환의 노래뿐 아니라 차은택의 뮤직비디오가 대부분 발라드 음악을 바탕으로 하는 것은, “사는 게 멜로 같다”며 사랑에 대한 탐색을 선호하는 그의 취향 때문이기도 하다. 그의 뮤직비디오 중에서도 가장 많은 인기를 누렸던 브라운 아이즈의 <벌써 1년>과 왁스의 <화장을 고치고>도 마찬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