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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는 애수에 젖어,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2002-12-31

내 인생의 영화

시간이란 참 묘하다. 시계 속의 초침은 늘 일정한 간격으로 원을 만들어가는데, 해를 거듭할수록 시간의 속도감이 더 빠르게 느껴지는 까닭이다. 어떤 선배가 얘기해준 ‘세월은 나이의 속도만큼 흐른다’는 말이 정말 맞는 것 같다. 난 지금 시속 32km의 인생을 살고 있는 거다. 이쯤에서 드는 또 한 가지 생각. ‘난 무엇을 타고 질주하고 있는가’이다. 엔진 좋은 자동차는 아닌 것 같고, 무섭게 질주하는 오토바이는 더더욱 아니고… 아마도 ‘자전거’인 것 같다. 두 다리는 있는 힘껏 페달을 밟고, 머리와 가슴은 앞을 향해 온몸으로 바람을 맞으며, 넘어지지 않기 위해 계속 중심을 잡아야 하는. 힘껏 밟아 동력을 내지 않으면 멈추는 자전거를 타고, 나는 시속 32km로 질주해야 한다.

그런데 어떤 이들에겐 나이를 훨씬 넘는 속도로 살아야 하는 운명이 주어지기도 한다.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의 철부지 갱들. 그들에겐 세상의 거친 바람을 막아줄 부모나 가족이 없었다. 악셀러레이터를 조금만 밟아도 무섭게 질주하는 오토바이에 누들스와 친구들은 기꺼이 오른다. 그러나 대장격이었던 ‘누들스’가 감옥에 수감된 뒤 친구들과 누들스의 삶엔 커다란 간격이 벌어진다. 출소한 그의 앞엔 리무진을 대기한 채 멋들어진 양복을 입고 있는 맥스가 서 있다. 친구들과의 반가운 재회도 잠시, 누들스는 맥스의 제안으로 다이아몬드를 터는 데 동참하게 된다. 그러나 맥스와 친구들은 예전에 그가 알던 모습이 아니다. 다이아몬드를 턴 대가로 돈을 받은 뒤 기관총을 난사하는 친구들. 누들스가 감옥에 있는 동안 맥스와 짝눈, 팻시는 어느새 범죄와 폭력의 세계로 훌쩍 떠나 있다.

나이에 버거운 속도를 내기 위해 질주하면서도 자기중심을 잃지 않으려 애쓰던 누들스는 당황한다. 그러나 악당이 되지 않으면 발을 들여놓을 수 없는 위험천만한 세상, 비열한 거리. 누들스는 방황하기 시작하고 믿었던 맥스는 돈과 권력에 집착하더니 급기야는 친구들을 배신하기에 이른다.

친구들의 비극적인 죽음 뒤 35년 동안 도피했다가 다시 뉴욕으로 돌아온 백발의 누들스는, 그 옛날 데보라를 훔쳐보던 화장실 벽구멍 저 너머, 어린 시절의 아득한 추억 속으로 빠져든다. 시계를 훔치면서 시작된 맥스와의 첫 만남, 아무도 없던 식당에서 떨리는 가슴으로 데보라와 마주했던 그 설렘, 돌아가며 페기와 몹쓸 짓 하는 녀석들을 기다리며 옥상에서 느끼던 씁쓸함, 단돈 1달러 때문에 자릿세를 못낸 신문 가판대에 불을 지르던 무모함. 5센트하는 크림케이크조차 군침 흘리며 바라볼 수밖에 없던 배고픈 시절이었지만, 짝눈이 불어주는 경쾌한 팬플루트 소리만큼이나 그들에겐 희망을 키우는 시간이기도 했다.

공장에서 내뿜는 연기 자욱한 건물 아래 휘파람 불며 씩씩하게 거리를 활보할 때까지만 해도, 이 철부지 갱들은 몇분 뒤 다가올 비극을 알지 못했다. 버그가 나타났다며 도망가라고 소리지르는 꼬맹이의 목소리를 뒤로 한 채, 뛰어가던 등뒤로 울린 한발의 총성. 누들스는 꼬맹이를 죽인 악당 버그의 몸에 몇번이고 칼을 쑤시고야 만다…. 대공황과 금주법으로 대변되던 어둡고 습한 30년대의 미국은, 5명의 소년들에겐 그렇게 잔인했다.

플래시백을 통해 현재와 과거의 풍경을 오가며 슬픈 시대를 비장하게 그려낸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연출과 기억 저편에서 아련하게 울려퍼지듯 깊이있는 애수로 가슴을 뒤흔드는 엔니오 모리코네의 영화음악이 최상의 하모니를 이루었던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그러나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보여준 로버트 드 니로의 미소가 없었다면 이 영화는 미완성이었을지도 모른다. 닿지 못한 인연의 슬픔과 발버둥쳐도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란 비극의 그 처절함을 너무나 잘 표현해준 까닭이다. 개인적으로 로버트 드 니로보다는 내면을 바라보는 눈빛이 매력적인 알 파치노를 좋아하지만, 이 영화에서 로버트 드 니로가 보여준 그 미소는 어떤 영화에서도 볼 수 없었던 100만달러짜리 웃음이었다. 세상은 마치 시속 2002km로 달려가듯 빠르게 변한다. 영화 초반에 마치 로버트 드 니로의 긴장된 심리를 대변하듯 신경질적으로 울리던 전화벨 소리가 내 귓가를 울린다. 그럴 땐 질주를 잠시 멈추고, 짝눈이 불어주던 팬플루트 소리에 맞춰 가볍게 행진하고 싶다. 자전거를 타고 이제 시속 33km를 달려야 할 올 한해. 멈춤과 진행을 적절히 조절하면서 두팔을 벌리고 고개를 하늘로 향해도 넘어지지 않을 만큼, 자전거를 잘 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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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연숙/ 프리비젼 기획실 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