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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사 신문 제 5호 (1912~1914) [2]
2003-01-02

격주간 · 발행 씨네21 · 편집인 이유란

찰리 채플린 인터뷰“어머니, 가장 위대한 스승”

헐렁한 바지와 꽉 끼는 윗도리, 작은 모자와 큰 신발, 그리고 짧은 콧수염과 지팡이. 1914년 <베네치아의 어린이 경주>에서 첫선을 보인 ‘떠돌이 찰리’가 어느새 우리의 벗이 됐다. 같은해 11월 개봉해 최초의 장편 희극영화인 <틸리의 무너진 사랑>에서 그는 ‘치사한’ 떠돌이로 분해 웃음을 자아낸다. 이 영화에서 찰리는 돈을 노리고 어리석은 뚱녀 틸리를 우롱한다. 틸리는 그런 줄도 모르고 찰리를 따라 도시로 왔다 고생길에 접어든다. 나중에야 찰리에게 속은 것을 안 틸리는 요란한 복수극을 펼친다. 그를 쫓아 연신 총을 쏘아대면서. 자그마한 찰리와 그의 세배는 됨직한 틸리가 좌충우돌하며 벌이는 소동들은 기막히게 우습다.

이 떠돌이를 세상에 내보낸 이는 영국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연극배우 출신 찰리 채플린(25)이다. 채플린은 그가 속한 카노 극단의 미국 순회공연 때 미국 희극영화의 산실인 키스톤영화사 대표 맥 세넷의 눈에 띄어 1914년 초 <생활비 벌기>로 영화에 데뷔했다. 그는 두 번째 영화 <베네치아 …> 이후 언제나 ‘떠돌이 찰리’로 우리를 찾아왔다. 대체 이 희대의 떠돌이는 어떻게 태어났을까

어떻게 ‘떠돌이 찰리’라는 인물을 창조했는지요.

우연이었어요, 정말. 촬영장에서 하루는 맥 세넷이 ‘아무거나 좋으니 희극 분장을 하고 와’라고 하더군요. 처음엔 아무 생각이 없었어요. 근데 의상실로 가면서 커다란 바지, 커다란 구두를 신고 중산모와 지팡이를 두르면 어떨까 싶더군요. 의도적으로 모든 것이 부조화스럽게 보이도록 했어요. 그가 어떤 사람일지, 처음엔 아무 생각 없었는데 그런 차림을 하자 그 인물이 이해되더군요. 촬영장에 도착했을 때 찰리는 이미 완성되어 있었습니다.

찰리의 차림새는 프랑스에서 활동 중인 코미디인 막스 렝데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의 스타일은 참고했나요.

맞아요. 렝데가 창조한 막스라는 인물도 높은 모자를 쓰고 지팡이를 들었죠. 하지만 그의 막스는 아주 우아하게 차려입은 중산계층의 인물이죠. 또한 찰리는 내가 보아온 모든 평범한 영국인들을 합쳐놓은 인물이기도 해요.

렝데 이외에 또 누구의 영향을 많이 받았나요.

우리 어머니요. 정신분열증으로 정신병원을 들락거린 불쌍한 분이죠. 어머니는 내가 본 가장 훌륭한 팬터마임 배우였어요. 어머니는 창가에 앉아 거리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손짓과 눈짓, 표정으로 재현했어요. 사람을 관찰하는 법은 어머니가 내게 가르쳐준 가장 귀한 교육입니다. 그 덕택에 사람들이 우습게 여기는 게 뭔지 알게 됐으니까요.

연극에서 영화로 넘어왔는데, 적응하는 데 어렵지 않았나요.

왜 아니겠어요. 키스턴스튜디오에 가보니 일주일에 두편의 영화를 내놓기 위해 영화를 무진장 빨리 찍더군요. 그러느라 즉흥연출도 너무 많고. 이 <틸리의 무너진 사랑>은 촬영에 3개월이 걸렸는데 그건 아주 이례적인 일이었죠. 연출 원칙도 간단했어요, 화면에 등장할 때와 퇴장할 때 왼쪽 오른쪽을 구별하기만 하면 됐으니까. 그래선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없죠. 불평불만이 계속 늘었죠. 그랬더니 세넷이 저보고 직접 연출을 해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감독이 됐죠. 앞으로도 계속 출연과 감독을 겸할 생각입니다.

루이 푀이야드의 <팡토마>

모던 아트의 정수

“위고의 최고작 수준, 아니 그보다 더 아름다운.” 젊은 작가 모리스 레이날의 찬탄이다. 1914년 6∼8월호 <Les Soire(e 위에 \')es de Paris>에 실린 그의 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내가 감히 그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 하지만 용기를 내보자. 그 눈부신 우아함은 당신을 숨막히게 만든다”라고. 레이날만이 아니라 앙드레 브레통, 기욤 아폴리네르도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무엇에 대해 루이 푀이야드의 <팡토마>에 대해!

<팡토마>는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범죄 연작이다. 각각의 에피소드는 완결성을 가지면서 동시에 다음 에피소드에 연결된다. 1913년에 발표된 첫 번째 에피소드는 공주의 귀금속을 훔쳐 달아난 팡토마와 그를 쫓는 주브 경감의 대결이 펼쳐진다. 팡토마는 경찰에 잡혀 사형선고까지 받지만 귀족 애인의 도움으로 탈출에 성공하는데, 그 방법이 정말 오묘하다. 팡토마는 항상 잡히고 항상 탈출에 성공한다. 그래서 매번 손에 담을 쥐게 된다. 그는 점점 더 대담해진다. 애인의 집을 폭발시키고 가스 누출로 무고한 여인을 질식사시킨다. 가장 대범한 행동은 부임하는 판사를 죽이고 그가 판사 노릇을 하는 가장 최근의 시리즈다. 천재적인 변장술, 귀족적인 행동으로 그는 상류사회를 교란한다. 법망이나 제도, 감옥, 도덕은 그에게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매력적이다. 루이 푀이야드의 연출 솜씨는 탁월하다. 그는 특히 카메라를 한동안 고정시켜두고 등장인물들을 뒤에서 앞으로 움직이게 하면서 공간의 깊이를 연출하는데, 이는 등장인물들이 주로 좌우 한쪽에서 등장해 반대쪽으로 퇴장하는 필름 다르의 영화나 편집 기술을 정교하게 다듬어가고 있는 미국영화와는 완연히 다르다.

<팡토마>는 프랑스에서는 물론 세계적으로 흥행에 성공했으며, 지식인들의 호평을 얻었다. 특히 초현실주의자들이 좋아했는데, 그들은 “사실적인 세부묘사, 진한 시적 이미지, 순수한 판타지의 결합에서 모던 아트를 재정화하려는 우리의 시도를 본다”고 평했다. 한편 <팡토마>의 성공은 세계적으로 연작영화 붐을 가져왔다. 1914년 나온 미국의 <위기에 빠진 폴린> 등은 그 영향으로 만들어진 연작영화들이다.

영화에 관한 말, 말, 말“영화는 대중성을 요구한다”

필름 다르의 시도를 비롯, 영화가 예술로 무르익어감에 영화를 예술로서 바라보는 논의들이 분분하다. 이미 1911년 리치오토 카뉘도는 영화를 제 6 또는 7의 예술이라고 선언한 바 있다. 영화는 어떤 예술인가, 영화 고유의 미학은 무엇인가 이에 관한 평론가들의 다양한 견해를 들어본다.

● 게오르그 루카치 “연극의 힘이 배우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데서 나오는 반면 영화의 잠재력은 현실을 ‘영혼없는 삶, 순수한 표면’으로 바꾸는 능력에 있다.”(1913년, <영화 미학에 관한 생각들> 중)

● 아벨 강스 “영화는 여섯 번째 예술, 그러나 아직 그 첫 번째 웅얼거림을 넘어서지 못한 예술이다. 영화는 프랑스 비극처럼 그 진정한 토대를 다져줄 고전을 기다리고 있다. 영감을 얻은 예술가들이 영화를 단순한 즐거움 이상으로 생각할 때 이 여섯 번째 예술은 전세계적으로 연극이나 책보다 더 깊이 그에 대한 믿음을 확대할 것이다.”(1912년, <제6의 예술> 중)

● 이캄(YHCAM) “첫 번째 원칙은 영화는 그것이 말 거는 대중과 상호 교감해야 한다는 것이다. 영화 스펙터클은 연극보다 훨씬 생생한 인상을 준다. 등장인물의 침묵은 영화의 가장 매력적인 점이다. 관객은 청각적인 암시 덕에 등장인물이 침묵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 관객은 등장인물의 입이 되어서 스스로에게 말한다. 자기가 자기에게 하는 말이므로 그 인상은 참으로 강렬하다. 따라서 영화만큼 관객의 상상력이 큰 역할을 하는 예술은 없다.”(1912년, <시네마토그라피> 중)

● 루이 오그마르(Luis Haugmard) “영화는 중요하고도 모던한 새로운 유형의 사업으로 철저하게 대중성을 요구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신문이 책을 몰아내게 한 것처럼 영화는 연극을 대체하고 있다. 영화는 덜 비쌀 뿐만 아니라 최소한의 지적 노력만 요구한다. 영화는 연극보다 나은 것을 대중에게 준다. 연극은 하나의 감정만을 주지만 영화의 많은 장르들은 다양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대중은 영화 속에서 그들의 비참하고 단조로운 삶, 그들이 도망치고 싶은 삶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준다. 그것은 대중에게 ‘유쾌한 여행’의 기회를 제공한다.”(1913년, <영화의 미학> 중)

레오니드 안드레예프 “현재의 임무는 영화와 연극을 구별하고 각각의 기본적인 창조적 요소들을 정확히 결정하여 그 자신의 진정한 경로를 배치하는 것이다.”(1913년, <연극에 관한 두 번째 편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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