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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사 신문 제 5호 (1912~1914) [1]
2003-01-02

격주간 · 발행 씨네21 · 편집인 이유란

제2의 르네상스 맞는 이탈리아

<카비리아> 등 대규모 영화제작, 흥행·비평 모두 성공

이탈리아영화의 전성시대가 도래하는가 1913년 <폼페이 최후의 날> <쿼바디스>가 전세계적으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데 이어 1914년에는 <카비리아>가 다시 이탈리아영화의 힘을 과시했다. 이탈리아 역사에서 소재를 취한 이 역사물들은 150분에 이르는 상영시간과 수천명의 엑스트라, 대규모의 세트로 화려한 스펙터클을 제시한다.

최근작 <카비리아>의 제작과정은 그 규모의 장대함을 능히 짐작하게 한다. 로마와 카르타고간에 벌어진 제2차 포에니 전쟁을 배경으로 시실리에서 포에니 해적에게 납치된 고아 카비리아가 자라서 이 전쟁에 연루되는 과정을 그린 이 영화는, 제작비 100만리라가 들어간 대작이다. 또한 자료조사에만 1년이 걸렸으며 촬영기간도 6개월이 넘었다. 지오바니 파스트로니 감독은 대규모의 제작진을 이끌고 시실리, 알프스 등지로 촬영 원정을 떠나기도 했다.

<폼페이 최후의 날> 후반부에는 원형경기장을 가득 메운 군중이 검투사들의 결투를 보는 장면이 나온다. 이 영화는 마지막 부분에서 붉은 화면 위에 화산 폭발로 인한 재앙을 그리는데, 거대한 불덩이가 떨어지고 큰 석조건물이 무너지는 장면이 그야말로 장관이다. 상영시간 135분인 <쿼바디스> 또한 예사롭지 않다. 초기 기독교들이 겪은 박해를 소재로 한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쿼바디스>는 5천명의 엑스트라가 등장하고 원형경기장에 2륜 마차 경주가 재현된다. 흥행수익도 엄청나서 <쿼바디스>는 제작비의 20배를 벌어들였다. 해외에서 밀려오는 프린트 수요를 맞추느라 치네 스튜디오 기술진은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이 역사물들은 규모와 흥행만이 아니라 만듦새도 주목을 요한다. 특히 <카비리아>는 영화인들에게 큰 관심을 끌었는데, 자유롭게 세트를 누비며 인물들에게 다가가서 클로즈업을 담기도 하고, 또 거기에서 빠져나와 다시 넓은 화면을 잡는 유려한 촬영기법 때문이다. 영화인들은 이를 ‘카비리아의 움직임’이라고 불렀다. 파스트로니 감독은 스페인인 카메라맨과 함께 ‘돌리’를 발명했으며(그는 이에 대한 특허도 냈다), 촬영을 위해 처음으로 크레인을 사용했다. 하지만 6월에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 사이에서 발발해 현재 전 유럽으로 확대되고 있는 전쟁은 이탈리아영화의 미래에 암운을 드리우고 있다. 치네 소속의 한 영화인은 “전쟁으로 모든 것이 바뀔 것”이라고 비관했다.

할리우드의 ‘무비 러시’영화제작자들 LA로 이동, 스튜디오 제작 붐

할리우드가 미국영화의 새로운 메카로 떠오르고 있다. 주로 뉴욕과 뉴저지를 기반으로 활동했던 제작자들이 로스앤젤레스 근교인 할리우드에 새로운 둥지를 틀고 있다. 1908년 셀리그의 제작진은 로스앤젤레스로 현지촬영을 나왔는데, 다음해 이곳으로 되돌아와서 임시 스튜디오를 지었다. 이것이 ‘무비 러시’의 시작이었다.

이주의 가장 큰 원인은 일년 내내 영화촬영이 가능한, 맑은 날씨가 계속된다는 데 있다. 영화가 붐을 이루면서 일주일에 20, 30편의 신작을 내놓아야 하는 제작자에게 이같은 기후는 거의 천혜의 조건과 같다. 또한 할리우드는 사막, 바다, 산맥 등 다양한 자연경관으로 품고 있으며, 땅값이 싸서 대규모 스튜디오를 짓는 데 상대적으로 비용을 절감할 수가 있다.

1914년, 제작자들의 러시는 일단락이 된 상태. 주로 독립제작자들이 재빠르게 옮겨와 이곳에 신생 영화사들을 차리고 있다. 허트킨슨은 11개의 지방 배급사를 묶어 파라마운트를 설립했다. 파라마운트는 장편 극영화만을 배급하는 최초의 전국적인 배급사였다. 아놀드 주커는 파라마운트를 통해 페이머스 플레이어즈의 영화들을 배급했다. 칼 래믈은 유니버설픽처스를, 윌리엄 폭스는 폭스영화사를 설립했다. 일년 전인 1913년에는 워너 형제가 워너브러더스영화사를 차렸다. 이 독립제작자들은 유사한 경로를 밟아왔다. 곧 극장의 쇼맨에서 출발해 니켈오데온 운영, 영화제작, 그리고 전국적인 배급업자로 사업을 확대해온 것이다. 이들은 MPPC 소속사들이 여전히 한두릴짜리 영화를 고집하고 있을 때 제작과 배급에서 장편영화의 가능성을 진작에 알아봄으로써 번창일로를 걸어왔다. 한편 이들 대부분이 동유럽에서 건너온 유대인 이민 1세대라는 것도 재미있는 공통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단 신 들

미, 호사스런 극장 등장

“꿈의 궁전으로 오세요.” 미국 극장의 풍경이 바뀌고 있다. 장편영화의 일반화와 함께 불편하고 좁고 지저분한 니켈오데온 극장이 영화 전용으로 지어진 호사스런 영화궁전과 극장들에 자리를 내주고 있다. 1914년 뉴욕 브로드웨이에 3300석을 갖춘 스트랜드 극장이 문을 열었다. <뉴욕타임스>는 극장 개관일의 참관기를 다루면서 네오 코린트식 장식과 푹신한 좌석에 탄복했으며 이날 경험을 “대통령 리셉션에 참석하는 것과 같은 일”에 비교했다. 영화궁전의 시대는 지난해 ‘뉴욕에 최초로 건설된 디럭스 영화전용관’인 2460석 규모의 리젠시의 오픈으로 시작됐다. 이 극장은 오르간, 오케스트라, 합창단과 오페라 가수들, 고객을 좌석으로 안내하는 안내인, 금박으로 장식한 화려하고 분위기 있는 실내를 갖추고 있다.

독, 작가영화 등장

1913년 독일에 ‘아우토렌필름’(autorenfilm) 곧 작가영화가 등장했다. 아우토렌필름의 첫 작품은 <타인>으로 극작가인 파울 린다우가 쓴 희곡을 각색했으며 연극배우인 알베르트 바세르만을 캐스팅했다. 이처럼 연극인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아우토렌필름은 사실상 프랑스의 필름 다르에 견줄 만한 영화로, 영화각본이나 영화로 각색된 문학작품을 쓴 유명작가 덕분에 널리 알려졌다.

셀애니메이션 탄생

1914년 애니메이션 제작에 기술적인 혁신이 일어났다. 젊은 애니메이터 얼 허드는 투명 셀룰로이드에 그린 그림으로 움직이는 형상을 만드는 아이디어를 내고 특허권을 신청했다. 이 기법은 배경은 그대로 두고 움직이는 부분만 별도의 셀에 조금씩 다시 그림으로써 애니메이션 제작 공정을 크게 단축시켰다. 그 이전까지는 종이 위에 그림을 그리면서 매번 배경을 그리거나 똑같은 배경을 인쇄해서 사용했던 것이다. 한편, 투명 셀룰로이드에 그려진 애니메이션은 곧이어 ‘셀애니메이션’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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