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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벨바그에 대한 감독 개인의 추억,<찰리의 진실>
2003-01-07

■ Story

레지나(텐디 뉴튼)는 미술품 중개상인 남편 찰스 램버트와의 불행한 결혼생활을 결국 끝내기로 결심한다. 친구와의 여행에서 돌아온 그녀는 남편의 갑작스런 살해소식을 접한다. 남편의 죽음과 함께 숨겨져왔던 그의 정체가 드러난다. 이즈음 레지나는 우연히 조슈아(마크 왈버그)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미국대사관의 직원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바톨로뮤는 레지나를 찾아와 사진 한장을 보여준다. 레지나는 남편의 행적을 뒤지고, 사진 속의 인물들은 레지나의 주위를 맴돌고, 바톨로뮤와 파리 경찰은 이들을 뒤쫓는다.

■ Review

그의 본명은 ‘찰리 레이크’였다. 스위스인도 아니었고, 미술품 중개상도 아니었다. 미국대사관 무장요원으로 근무했으며, 작전 중 훔쳐낸 다이아몬드를 빌미로 죽음을 초래한 사기꾼에 불과했다. 여기까지가 사실관계에 의한 ‘찰리의 진실’이다. 한편으론, 여기서부터 찰리를 뺀 나머지 인물들만이 전면에 등장한다. 이 점을 재미있다고 생각한다면 맥거핀이라고 부를 수도 있고, 그냥 당했다고 생각한다면 단순한 속임수라고 화낼 수도 있다. 어쨌거나, 조너선 드미는 이런 식의 취사 선택적 반응이 얼마든지 가능할 수 있다고 유연한 태도를 보일 것이다. 그것이 또한 <찰리의 진실>에서 보여주는 자신의 영화적 선택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찰리의 진실>은 1963년 스탠리 도넌의 원작 <샤레이드>를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낭만적인 음악들과 함께 원작의 무대였던 파리는 여전히 다시 한번 등장하지만, 캐리 그랜트와 오드리 헵번의 로맨스에 집중되어 있던 인물들의 관계 설정은 다양한 인물들로 분산되어 있다. 레지나와 조슈아의 애정관계를 중심으로 놓으면서도, 그 주위를 맴도는 세명의 조연들에게 역시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이들을 다 인종으로 구성한 뒤 그들의 악역 이미지를 퇴색시키기도 한다(박중훈이 맡고 있는 역할이 이중 하나인 이일상이다. 조너선 드미는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 출연한 박중훈의 연기를 보고 이 영화의 캐스팅을 제안했다). 레지나를 뒤쫓던 이들은 사실상 그녀의 남편에게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다. 처음에는 마치 곧 죽일 듯 위협적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레지나와 이들 사이에는 이상한 공감대가 형성된다. 오히려 위험한 인물은 레지나의 보호자인 것 같았던 바톨로뮤, 혹은 실제의 카슨 다일이다. 그들을 뒤쫓는 미대사관 직원 바톨로뮤(또는 바톨로뮤라고 속인 카슨 다일) 역에 팀 로빈스를 배치함으로써 영화는 주변과 중심 사이의 균형을 맞추어놓는다. 다르게 말하면 인물들의 배치를 통해 중심적인 서사를 얼마간 해체해놓는 것이다.

감독으로서의 조너선 드미의 위치를 극상시켜놓은 <양들의 침묵> <필라델피아>와 달리 <찰리의 진실>은 꽉 짜여진 서사의 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의 서사가 어딘가 모르게 엉성하다고 느낀다면 일단 조너선 드미의 의도를 절반은 받아들인 셈이 된다. 이 영화의 일단의 재미는 의도된 엉성함에 있다. 조너선 드미는 <찰리의 진실>을 프랑스 누벨바그풍의 영화로 만들고 싶어했다. 누벨바그란 공유적인 영화적 특징없이 출발했다는 것이 오히려 그들 집단만의 특징이었다. 누벨바그의 공통분모는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의도에 있었다. 영화는 어떻게 해야 영화적일 수 있는 것인가의 질문들, 영화는 어떻게 스스로의 역사를 입증할 것인가의 문제들. 그 의도가 형식을 질문하면서 영화적 특징 중 하나가 된 것이 바로 ‘끊임없이 방해받는 처지에 놓이게 된 서사의 일관성’이다.

(왼쪽부터 차례로)♣ 찰리에게 다이아몬드를 뺏긴 이일상과 자다펙, 롤라는 레지나를 뒤쫓는다. 이들 중 이일상만이 살아남는다. 찰리를 죽인 범인은 누구인가?♣ 파리의 분위기와 너무나 닮아 있는 남자 조슈아. 레지나는 그의 매력에 점점 더 빠져든다.♣ 카슨 다일은 어떻게 살아남게 되었는가? 레지나는 카슨 다일과 바톨로뮤 사이에서 혼란스러워 한다.

먼저 말하자면, 그러나 그 ‘형식’을 따르기는 하지만, 그 ‘의도’가 조너선 드미의 또는 <찰리의 진실>에서의 관심은 아니다. 영화 속에서 악인과 선인의 대립은 희미해진다. 감정은 극에서 극으로 달리는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 풀어진다. 그러면서 이야기도 같이 산만해진다. 때로는 인과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장면들을 카메라는 보고 있다. 심지어 쫓고 쫓기던 사람들이 한자리에 서로 모여 탱고를 추기까지 한다. 인물들의 성격이 희미해지고 이야기가 산만해지는 반면, 영화의 전체적인 구조는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판타지에 기대어 ‘쿨’한 기운에 휩싸인다(이 느낌은 이일상이 던지는 미소로서 지표화된다). 이야기의 짜내는 긴장감을 가뿐하게 넘어서려는 제스추어들로 영화는 온통 채워져 있다. 그때마다 조너선 드미는 트뤼포의 이름을 빌려 누벨바그에 대한 자신의 개인적인 추억을 더듬고 있는 것이다(트뤼포의 영화 <피아니스트를 쏴라>에서 그 피아니스트의 이름이 바로 ‘찰리’이다).

이 영화는 그러니까, 누벨바그에 대한 추억으로 가득 차 있는 조너선 드미의 개인적인 앨범일 수밖에 없다. 헐리우드 B급영화에서 누벨바그로, 누벨바그에서 다시 헐리우드로(<샤레이드>) 이동해간 ‘영화애’의 역사는, 헐리우드 안에서 누벨바그를 이해하는 현재의 조너선 드미에게 철저하게 ‘취향’의 문제가 된다. 서사의 산만함도, 인물들의 분산적인 배치도, 아무때나 끼어들 수 있다고 믿는 판타지도, 모두 취향에 따른 선택이자 기억의 조합이다. 조너선 드미가 동경하고, 또 기억하고 있는 누벨바그영화의 형식은 그런 것이다. 그것을 마음껏 길어내어 펼쳐놓을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이것이 <찰리의 진실>의 진실이다. 아마도 이 영화의 인물들이 대부분 착한 낱말, 또는 쿨한 분위기에 싸여 있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동경과 사랑을 바탕으로 무언가를 추억하는 영화에 굳이 나쁜 단어들을 써가며 치밀한 척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하지만, 무엇인가가 순전히 취향의 문제라고 말할 때, 거기에는 언제나 할 수 없거나 막혀버리는 질문들이 남는다. 누벨바그의, 말 그대로의 그 새로운 물결 속에는 영화에의 애정만이 아니라 저항의 정신도 함께 넘실거리고 있었다. 아버지 세대의 영화에 반기를 들면서까지 새로운 영화의 역사를 창조하려 했던 그런 정신들. 형식을 만들어냈던 의도들. 추억에 젖은 남의 사진첩을 엿보며 이런 생각을 한다면 실례일까 정한석 mapp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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