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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대통령에게 바치는 사후 헌사,<컨텐더>
2003-01-14

■ Story

민주당 출신의 잭슨 에반스 대통령(제프 브리지스)은 공석이 된 부통령 자리에 여성인 레이니 핸슨(조앤 앨런)을 지명한다. 다른 후보를 지지하는 셸리 러니언(게리 올드먼)은 핸슨이 대학 시절 섹스 쇼에 가담했다는 내용의 자료를 입수해서 청문회를 연다. 양쪽 진영의 정치적 공방이 치열한 가운데, 정작 당사자인 핸슨은 자신의 정견만 발표할 뿐 사생활에 대해서는 일체 입을 열지 않는다.

■ Review

정치권이 부도덕하고 무원칙한 인간에 대한 최악의 상상을 제공하기는 한국이나 미국이나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경쟁자라는 뜻을 제목으로 가진 <컨텐더>는 백악관과 의회의 밀실에서 벌어지는 권력다툼 이야기에 할리우드 특유의 휴먼터치를 곁들인 정치스릴러다.

소재는 그리 새삼스러운 게 아니지만, 이 영화는 공격당하는 대상이 여성이고 성추문이 비장의 무기로 사용된다는 점에서 색다르다. 극중에 나오는 대사처럼 부통령 자리는 “쓰다 남은 권력”으로 불릴 만큼 비중이 크지 않음에도 그 주인공이 여성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는 것이다. 이런 일은 우리나라에서도 실제로 일어났다. 부통령이 아니라 총리였지만.

정치나 과학기술 등 몇몇 분야는 전통적으로 여성에 대한 봉쇄가 심한 영역이고, 사생활이나 공적 윤리에 관해서도 남성과는 다른 이중잣대를 적용받는다. 이런 상황을 요약한 것이 “규칙적으로 섹스를 하지 않는 여성 대통령은 핵무기 버튼 근처에 손가락도 얼씬 하면 안 된다”는 농담일 것이다.

<컨텐더>의 영화적 긴장은 여주인공 레이니 핸슨이 이런 혐의를 덮어쓸 만한 여지를 가지고 출발한다는 데서 비롯된다. 테이블 위에서 섹스를 하려다 남편이 아랫도리를 벗은 채로 대통령의 전화를 받는가 하면, 본인 또한 호흡을 추스리지 못한 채 수화기를 넘겨받는다. 대학 신입생 때 두 남자와 동시에 섹스 쇼를 벌였다는 혐의에 대해서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는 태도, 친구의 남편과 연애를 해서 결혼했다는 사실, 백악관에 붉은색 옷차림으로 나타나는 것 등이 모두 반대세력에 빌미를 제공하고 언론과 인터넷에 접속하는 대중들의 표적이 된다.

핸슨은 청문회와 언론 인터뷰에 불려다니는 동안 이런 사실들에 대해 일체 함구하면서 자신의 정치적 견해만을 줄기차게 피력한다. 이같은 모습을 통해서 로드 루리 감독은 정치인에 대해 정치적 역량을 문제 삼지 않고 사생활을 물고 늘어지는 것은 여성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강간이라는 생각을 관객에게 설득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긴장감이 높아지는 순간은 청문회에서 정적인 러니언이 핸슨을 향해 “낙태에 대해 찬성하는 당신은 아기 살인자”라고 공격하는 장면이다. 이때 핸슨은 러니언의 부인이 낙태를 한 적이 있다는 정보를 이미 손에 쥐고 있다. 카메라는 흥분해서 떠벌리는 러니언으로부터 빠르게 커트해서 갈등하는 핸슨의 얼굴 클로즈업으로 옮겨간다. 그러나 핸슨은 그 사실을 폭로하지 않고 다시 한번 자신의 원칙을 반복한다. 감독이 <컨텐더>를 “정치에 관한 영화가 아니라 원칙에 관한 영화”라고 밝히는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그는 “내 딸에게 공평한 기회가 주어지고 이중잣대가 적용되지 않으며 원칙이 정치적인 이유로 변질되지 않는 세상에서 자라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소신있고 유능하며 도덕적 승리를 통해서 정치적 승리까지 거머쥐게 되는 핸슨은 영화 속에서 긍정적인 여성상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을 만족시킬 만하다. 그러나 이 영화의 논쟁적인 힘은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급격하게 떨어진다. 핸슨이 과연 섹스 쇼를 했을까, 성적인 ‘실책’을 한 적이 있는 여성은 고위 공직에서 일하면 안 되는가. <컨텐더>를 힘있게 끌고 가던 이같은 도덕적 긴장에 맥이 풀리고 대신 말랑말랑한 드라마와 정치적 설교를 보게 되기 때문이다.

<컨텐더>는 민주당 노선에 대한 옹호와 전 대통령 빌 클린턴에게 바치는 사후 헌사라는 측면도 강하다. 이 영화가 제작에 착수했을 때 클린턴은 르윈스키 스캔들로 탄핵을 받던 중이었다고 한다. 당사자가 합의한 섹스를 공적인 영역에 끌고 나와서 공격하는 것은 성적 매카시즘이라는 논지 자체가 클린턴-르윈스키 사건에 대한 핵심적 옹호일 뿐만 아니라, 여러모로 클린턴을 연상시키는 젝슨 에반스 대통령이 레이니 핸슨에 대한 가장 강력한 지원자로 묘사된다는 점도 같은 맥락에 놓여 있다.

신념에 찬 핸슨이 청문회와 인터뷰를 통해서 줄기차게 이야기하는 것은 낙태 선택권, 사형 철폐, 가정의 총기류 압수, 미성년 담배 판매금지, 선거법 개정안, 정치와 종교의 분리, 평등 조세, 국제 정치와 군사력에 대한 합리적인 접근 등 민주당의 전통적인 정책 노선들이다. 민주당 출신인 에반스 대통령 또한 백악관 내 볼링장에서 참모들과 대화하면서 “볼링 치느라 공격 버튼을 못 누르니 테러리스트들이 좋아하려나”라는 농담을 던짐으로써 공화당의 공격적인 노선을 간접 비판한다.

이 영화의 자잘한 묘미 가운데 하나는 음식을 통한 비유다. 예를 들면 잭슨 에반스 대통령이 상대진영의 정치인에게 상어고기 샌드위치를 먹으라고 권유하는 장면에 뒤이어 상대방을 단숨에 침몰시키는 대반격을 구사하는 이야기가 나오는 식이다. 에반스 대통령이 수시로 아무 데서나 백악관 주방에 전화를 걸어 음식을 주문하는 것은 클린턴의 실제 습관과 닮았다고 한다. 날카롭게 찢긴 듯한 프레임으로 일종의 아이리스 효과를 만든 오프닝 타이틀 역시 같은 맥락에서 나온 아이디어라는 것도 뒤늦게 알게 되는 재미였다.

<컨텐더>는 백악관 비사를 할리우드 스타일로 적당히 버무림으로써 재미있고 나름대로 생각할 만한 이슈도 제공한다. 올바르긴 해도 그다지 진보적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다는 게 불만이지만. 김소희/ 영화평론가 cafe.daum.net/cw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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