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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사신문 제 6호(1915~1918) [2]
이유란 2003-02-17

전쟁은 영화를 죽인다

프랑스·이탈리아 영화산업 쇠퇴, 독일은 국가 선전 수단으로 전락

전쟁과 영화, 그 함수관계는 1914년 발발, 전세계로 확전되고 있는 전쟁이 영화산업의 지형도를 급속도로 바꾸어놓고 있다. 세계 영화시장에서 수위를 다퉜던 프랑스와 이탈리아 영화산업이 빠르게 쇠퇴하고 있는 반면, 독일과 미국은 급팽창하고 있다. UFA(Universum Film Akteiengesellschaft)의 설립은 바로 이같은 판도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1917년, 독일 정부는 기존의 군소 영화사들을 통합해 UFA를 세웠다. 독일군 사령관 에리치 루덴도르프는 12월 독일의 영화사뿐만 아니라 배급업자와 상영업자들을 총망라하는 영화산업의 합병을 명령했다. 독일 정부는 한해 전 외국영화의 수입을 전면 금지한 바 있다. 이 두 조처는 동일한 목적을 위해 취해졌는데, 곧 독일 정부는 연합군 소속 국가에서 만들어진 반독일적 영화의 수입을 금지하는 한편, UFA를 설립해 독일의 국가적 이데올로기를 홍보하는 영화를 만들도록 했다. 독일 정부는 영화의 프로파간다적 파급력을 잘 알고 있었고 이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국가가 주도하는 거대 시스템을 만들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또한 외국영화 수입금지로 독일 국산영화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고 있었던 것도 UFA 설립의 주요 배경이 된다. 이러한 목적에서 독일 정부는 경제적으로 극심한 불황을 겪으면서도 베를린 근처 뉴바벨스베르크에 유럽에서 가장 큰 스튜디오를 지었다.

반면, 멜리에스와 뤼미에르의 나라인 프랑스는 전쟁이 시작되자 영화제작을 중단했다. 영화에 종사하던 인력은 전선으로 보내졌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영화사인 파테의 생필름 공장은 군수품 제조에 돌입했고 스튜디오는 병영으로 사용되었다. 1916년 전쟁에 끼어든 이탈리아 또한 프랑스만큼은 아니지만 영화제작이 크게 위축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 할리우드의 스튜디오들은 재빨리 유럽시장 개척에 나섰다. 1916년 미국영화의 해외 수출은 극적으로 증가했다. 예컨대 프랑스에서 미국영화 점유율은 이미 50%를 넘어섰다. 작가인 필립 수포는 이같은 미국영화의 대대적인 진출을 ‘혁명’에 비유했다. 그는 “우리는 말발굽 소리, 모터가 돌아가는 소리, 폭발음을 듣는 것처럼 느꼈다. 우리는 극장으로 달려갔고 모든 것이 변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크린에는 펄 화이트의 미소가 있었다. 그것은 혁명, 즉 새로운 세계의 시작을 알리는 잔인한 미소였다”라고 평했다. 이렇듯 전쟁은 스크린 위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영화사신문 연구 - 몽타주 이론이란?새로운 공간을 창조하다

“이제 영화기법의 원천으로 추구해야 할 것은 몽타주다.” 1916년 이렇게 선언한 러시아의 감독 겸 이론가 레프 쿨레쇼프가 1917년 <기능공 프라이트의 계획>을 발표했다. <기능공…>은 쿨레쇼프가 몽타주 이론에 따라 만든 첫 번째 영화로, 그에 따르면 몽타주란 “예정된 순서로 숏들을 결합하는 것”이다.

쿨레쇼프의 몽타주 이론은 미국영화에 토대를 둔 것이다. 1916년, 17살의 나이에 이브게니 바우어 감독의 세트디자이너로 영화계에 입문한 쿨레쇼프는 진정으로 ‘영화적인 것’을 찾기 위해 다양한 영화관을 다녔다. 싸구려 영화관에서 그는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관객이 소비에트영화보다 유럽영화를, 유럽영화보다는 미국영화를 더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쿨레쇼프는 관객의 열광을 알아내기 위해 미국영화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소비에트영화는 한 곳에서 촬영한 아주 긴 숏들로 이루어진 반면, 미국영화는 다양한 지점에서 찍은 짧은 숏들이 예정된 순서에 따라 결합되어 있다는 점을 발견했다. 그는 영화만의 힘은 숏 안에 담긴 내용을 단순히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이런 숏들을 구성하고 결합하는 데 있다는 점을 확신했다. 특히 그는 주어진 순간에 가장 중요한 동작만을 클로즈업으로 포착하는 것을 ‘미국적인 방식’이라고 불렀으며, 가장 효과적인 몽타주는 이러한 ‘미국적인 방식’에 토대를 둔 것이라고 선언했다.

<기능공…>은 이같은 이론을 실현하려고 한 영화다. 더불어 그는 촬영과정에서 몽타주의 새로운 효과를 발견했다. 극중 아버지와 딸이 목장을 걷다가 철탑을 올려다보는 대목을 찍을 때의 일이다. 쿨레쇼프는 기술적인 문제로 같은 장소에서 이러한 장면들을 다 찍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와 딸, 그리고 철탑을 각각 다른 장소에서 찍은 뒤 편집했다. 아무 문제가 없었다. “몽타주에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공간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확인한 쿨레쇼프는 이를 ‘인위적 풍경’ 혹은 ‘창조적 지형학’이라고 명명했다.

단 신 들

일, ‘순영화극 운동’ 일어

1918년, 일본에 ‘순영화극 운동’이 일고 있다. 이 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이는 가에리야마 노리마사(歸山 敎正)로, 그는 일본영화가 기존의 구태의연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한해 전에 쓴 영화이론서 <활동사진극 창작과 촬영법>에서 영화는 저급한 연극의 모방이 아니라 순수하게 그 본질을 나타내야 한다며, 무대 각본이 아닌 시나리오를 쓸 것, 여장한 남자배우가 아니라 진짜 여배우를 쓸 것, 변사가 아니라 자막을 활용할 것을 제언했다. 또한 그는 영화에는 속도와 리얼리즘, 환영이 필수적이라고 밝혔다. 이같은 이론적 배경에서 그는 1918년 <삶의 광채> <깊은 산속의 처녀>를 감독했다. 두 작품을 만들면서 그는 그의 제언들을 실천에 옮겼다. 배우들도 지식인층을 대상으로 한 연극에 주로 출연했던 신극 배우들을 캐스팅했다. 하지만 영화사쪽은 변사들의 반발을 우려해 이 영화의 개봉을 미뤄두고 있다.

미, MPPC 무효 판결

1917년, 미국 법원은 MPPC(Motion Picture Patent Company)가 법적으로 무효라고 판결했다. 1912년 미국 정부는 MPPC를 트러스트로 보고 그에 대한 소송절차를 밟기 시작했었다. 1908년에 에디슨사와 바이오그라프사 등 당시의 주요 영화사들이 총망라된 MPPC는 영화산업과 관련된 16개의 중요 특허를 보유하고 영화 전 공정에 대해 독점을 형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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