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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사 신문 제7회 (1919~1922) [1]
이유란 2003-02-18

표현주의 물결, 영화에서도프리츠 랑의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 극적 반전 눈길

1919년. 영화에도 표현주의 시대가 도래하는가. 영화 매체에서는 처음으로 표현주의를 도입한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이 비평가들과 관객 사이에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칼리가리…>의 세트를 디자인한 표현주의 화가 헤르만 바름은 “영화는 살아 움직이도록 만들어진 회화”라고 말했는데, 이 영화에서 그의 의도를 충실히 구현하고 있다.

액자 형식으로 구성된 이 영화는 프란시스라는 젊은이가 들려주는, 칼리가리 박사와 그의 사주로 연쇄살인을 저지르는 몽유병 환자 세자르의 이야기다. 그런데 놀랍게도 영화의 결말에 가면 화자인 프란시스가 실은 정신병자이며, 칼리가리는 그를 이해하려는 정신과 의사임이 밝혀진다. 그래서 잡지 <전진>은 <칼리가리…>를 “정신병 환자에 대한 연민을 담은 영화”라고 평가했다. 이러한 대담한 반전의 아이디어는 <칼리가리…> 제작자 에리히 폼머 휘하의 젊은 감독 프리츠 랑에게서 나왔다. 애초 <칼리가리…>의 연출을 맡았던 랑은 <스파이더>를 감독하면서 이 프로젝트에서 손을 뗐으나, 시나리오 작가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영화에 액자 구조를 도입해야 한다고 폼머를 강력하게 설득해 결말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칼리가리…>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표현주의 회화와 연극을 빼닮은 세팅과 연기. 표현주의 미술가 바름과 발터 뢰리그, 발터 라이만이 창조한 세팅은 극단의 공간 왜곡과 명암 대조로 구부러진 인간의 심리를 그대로 공간화한다. 배우들은 시각적 요소의 일부가 되는 반면, 세팅은 거의 살아 있는 요소로 기능한다. 제작진은 극히 양식화된 공간을 세트와 회화를 통해 만들어냈다. 이 영화에 나타난 극명한 명암 대조도 조명이 아니라 ‘회화’를 통해 나타난다. 그런 만큼 제작비가 크게 줄 수 있었다. 폼머는 “각본을 읽고 제작비가 비교적 적게 드는 영화가 될 것”임을 알아차리고 흔쾌히 제작을 수락했다.

하지만 이 영화의 표현주의적 특징은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는데, 요지는 이제 막 연극에서 벗어난 영화를 다시 연극화했다는 것이다. 특히 프랑스 비평가들이 혹독했다. 블레즈 상트라스는 노골적으로 “이 영화가 싫다”면서 그 이유의 하나로 “영화답지 않음”을 들었다. 또한 리오넬 란드리는 ‘칼리가리즘 혹은 연극의 복수’라는 글에서 “앞으로 모든 영화가 이렇게 되지는 않을까”를 진지하게 걱정했다.

소, 영화산업 국유화

모스크바에 영화학교 설립, 선전물 작업

1919년 소비에트 정부가 영화산업을 국유화했다. 또한 인민교육위원회 산하의 영화위원회는 세계에서 최초로 모스크바에 영화학교를 세웠다. 이같은 소비에트 정부의 조처는 침체의 늪에 빠진 소비에트의 영화산업을 진흥하는 동시에, 거의 대부분이 문맹인 소비에트 민중을 교육하고 볼셰비키의 이념을 선전하는 데 영화를 도구로 이용하기 위해서다.

영화의 선동성을 일찌감치 알아본 볼셰비키 정부는 뉴스릴과 소비에트를 지지하는 내용을 담은 선전물을 러시아 전역에서 상영해왔다. 1917년 사회주의혁명 이후 소비에트 영화산업은 크게 위축돼 있었다. 볼셰비키에 적대적인 영화제작자들이 반혁명에 가담하거나 아예 러시아를 떠났기 때문이다. 해외로 도피하면서 이들은 제작장비와 생필름을 몽땅 들고 갔다. 이중 어느 것도 러시아는 자체 생산하지 못하고 있었다. 소비에트 정부에 대한 서방의 무역 봉쇄는 어려움을 가중시켰다.

이에 정부는 1918년 개인 제작사가 구입하는 모든 생필름은 정부에 등록해야 한다는 법령을 발표했으나 제작자들과 상인들이 즉시 생필름을 감추는 바람에 도리어 부작용만 일으켰을 뿐이다. 이같은 상황에서 소비에트 정부는 영화를 국가의 관리 하에 두기로 결정했다. 한편 이번 조처로 그동안 방치되어온 러시아 국내외 영화들이 일반인에게 공개될 것으로 기대된다.

단 신 들

유나이티드 아티스트 창설

1919년 4월17일. 할리우드의 빅스타 찰리 채플린, 메리 픽포드, 더글러스 페어뱅크스가 데이비드 그리피스와 함께 영화사 유나이티드 아티스츠를 창설했다. 유나이티드 아티스츠는 앞으로 이 네 사람이 제작한 영화와, 이들과 뜻을 함께하는 영화인들의 신작들을 배급하게 된다. 이들이 메이저 스튜디오들에 저항해 이같은 조처를 취하게 된 것은 그들의 봉급을 억제하려는 움직임 때문. 출연료가 영화 한편당 15만달러를 넘는데다 입장료 수입의 일부를 배당받아 이들에게 들어가는 제작비 비중이 지나치게 높아지자 스튜디오들은 출연료 동결을 위해 이들에 대한 경쟁 입찰을 하지 않기로 비밀 협정을 맺었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자 이들은 스튜디오를 떠나 독자적인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바로 이 꼬마다!”

1921년. ‘신의 은총’을 받은 것 같은 꼬마를 찰리 채플린이 발견했다. 채플린은 <키드>의 아역 주인공을 선발하는 오디션에서 4살의 재키 쿠건을 보곤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부모의 보드빌 희극에 출연하곤 했던 쿠건은 채플린에 따르면 시쳇말로 “연기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여주었다”. 쿠건이 이혼에다, 태어난 지 3일 된 아들의 죽음으로 낙담에 빠진 채플린을 구원할 수 있을까? <키드>에서 쿠건과 채플린은 각각 미혼모가 버린 아이와 우연히 쿠건을 거두게 되는 떠돌이 찰리로 호흡을 맞추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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