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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작의 패기 그리고 한계,<국화꽃향기>

■ Story

2년 선배인 동아리 회장 희재(장진영)에게 첫눈에 반한 대학 신입생 인하(박해일), 그는 동아리 회원들과 함께 봉사활동하러 간 섬에서 희재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하지만 첫 키스는 이별의 선물이 되고, 희재는 인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대학을 졸업하고 동아리 선배와 결혼을 약속한 희재, 그러나 어느 날 끔찍한 교통사고가 희재의 부모와 연인을 모두 뺏어가버린다. 상실의 아픔으로 세상과 담을 쌓고 지내던 희재를 안타깝게 지켜보던 인하, 라디오 PD가 된 그는 자신이 맡은 프로그램에서 제3자의 사연인 양 희재에 대한 사랑을 전파에 실어보낸다. 마침내 희재는 7년을 기다려 자신을 찾아온 인하를 받아들이고 결혼에 이른다. 3년 뒤 찾아올 나쁜 운명을 예상치 못한 채로.

■ Review

“그녀의 머릿결에서 국화 내음 같은 좋은 향이 났다.” 소설 <국화꽃향기>의 한 문장이 예고한 것은 그녀를 향한 변치 않을 사랑이었다. 여인의 향기는 이제 막 세상에 첫발을 디딘 청년의 마음을 흔들고 그의 삶을 그 자리에 붙잡아둔다. 불덩이처럼 뜨거워진 가슴을 주체 못해 사랑을 고백하고 입맞춤하려다 뺨을 맞았던 그 시절의 열병을 떠올린다면

<국화꽃향기>에 감정을 이입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리고 일단 그 시절로 돌아가면 연인의 순탄치 않은 여정에 가슴이 아프다. 그들은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사랑하지만 오랜 이별에 비하면 행복의 나날이 턱없이 짧았다. ‘여기 아름다운 사랑이 있었다’는 흔적으로 여인은 아이를 남겨두고 눈을 감는다.

100만부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 <국화꽃향기>는 신파멜로의 내음이 물씬 풍기는 소설이다. 이뤄지지 못한 첫사랑으로 시작해 사랑하기에 불치병을 숨기는 설정으로 마무리되는 원작의 굵은 뼈대는 TV에서 <가을동화>가 차용했듯 눈물없이 볼 수 없는 드라마다. 게다가 주인공 청년은 모든 여자가 나의 연인이었으면 하고 꿈꾸는 이상적인 남자다. 그가 한 여자를 위해 그 자리에서 7년을 기다렸다면, 유구한 순애보의 역사에 이름을 새길 만하다. 영화가 본격적으로 원작과 달라지는 지점은 여기부터다. 소설의 주인공 이름, 승우와 미주 대신 새로운 인물, 인하와 희재를 택한 영화는 백마를 탄 어린 왕자 같던 승우를 약간 어수룩한 젊은이 인하로 바꿔놓는다. 극 초반 북클럽 신입회원 인하의 행동에선 막 어른의 세계에 진입해 허둥대는 소년의 모습(4월 개봉예정인 <질투는 나의 힘>이 표현한 바로 그것!)이 떠오른다. 이것은 소설에서 놓치고 있는 어떤 지점을 제대로 포착한 결과이다. 승우에게 찾아볼 수 없던 성장영화의 어떤 맥락을, 인하의 말과 행동 또는 배우 박해일의 이미지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학 신입생 인하는 북클럽에서 선배 희재를 만나 첫눈에 반한다. 그러나 인하의 사랑은 순간의 열병으로 취급받고 7년간 기다림을 강요받는다.

<국화꽃향기>가 <편지> <선물> <하루> 등 눈물의 멜로드라마와 동시에 배창호 감독의 <기쁜 우리 젊은 날>을 연상시키는 것도 이런 대목이다. <기쁜 우리 젊은 날>에서 흔들리는 카메라가 영민(안성기)의 시점숏으로 가난이 배어 있는 시장통을 헤매고 다닐 때, 신파멜로물로 변질될 수 있던 설정은 성장에 관한 드라마로, 상실의 아픔에 관한 비가로 바뀌었다. 하지만 <국화꽃향기>는 원작과 멀어진 그 지점에서 <기쁜 우리 젊은 날>과 엷은 스펙트럼을 공유할 뿐 좀더 과감해지지 않는다. <기쁜 우리 젊은 날>에서 영민에게 혜린(황신혜)은 첫사랑이자 가버린 젊은 날이며 다가설수록 멀어지는 이상향이었다. 그러므로 홀로 분식집에서 라면을 시켜먹는 혜린을 보는 순간 울컥 치밀어오는 것은 잃어버린 꿈과 시간의 토악질이다. 그런데 <국화꽃향기>에서 희재와 인하는 어떤가? 그들에게 기다림의 세월 7년은 속도감 있는 교차편집으로 날아가버린다. <국화꽃향기>는 이 즈음에서 <선물>이나 <하루>로 투항하는 수순을 밟는다.

이정욱 감독은 <국화꽃향기>를 “<편지>와 중간 정도의 영화”로 만들고 싶었다고 말한다. 둘 다 불치병을 등장시킨 영화지만 눈물샘을 자극하는 방식이 상반된 작품이기에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이야기다. 그러기 위해 이정욱 감독이 택한 방법은 눈물이 흘러넘치기 전에 ‘컷’을 부르는 것이다. 작정하고 울리는 영화를 만들겠다고 마음먹으면 있을 수 없는 편집이 <국화꽃향기>가 놓인 난처한 상황을 보여준다. 기어이 감동해야 할 순간들이 지체되고 유예될 때, 이 영화는 데뷔작의 패기와 한계를 동시에 드러낸다. 그건 오랜 기다림 끝에 그녀의 대문 앞에 그녀가 좋아하는 요플레를 잔뜩 쌓아놓고 프로포즈를 하는 주인공 인하를 닮았다. 이런 경우, 영화라는 가상공간은 그를 용납하더라도 현실에서 현명하다는 말을 듣긴 어려울 것이다.

인하와 희재의 첫 키스는 이별의 인사가 된다.희재의 친구인 산부인과 의사 정란은 오랜 시간 희재와 인하의 사랑을 지켜보며 연인의 사이를 잇는 다리 역할을 한다.(왼쪽부터)

물론 <국화꽃향기>가 심오한 영화가 되길 기대하는 관객은 거의 없을 것이다. <여성시대>류의 라디오 방송에서 종종 접하는 가슴 아픈 사연의 느낌이, 소설과 영화가 공히 내세울 만한 유혹의 향기다. 결코 실화의 감동을 따라잡지 못하겠지만 그 내음은 언제나 사람을 끄는 힘을 발휘한다. 라디오에서, TV에서, 소설에서, 영화에서, 다시 확인하고 되풀이함으로써 현실에서 겪어보지 않은 완벽한 사랑이 어딘가 존재한다고, 그렇게 계속 쭉 믿어보려는 것이다.남동철 namd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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