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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이런 거 언제 쓸까? <맥스군, 사랑에 빠지다>
2003-02-26

(이해영과 이해준, 늦은 밤 작업실에서 깡통맥주에 천하장사를 안주로 수다를 떨다.)

(준) 대관절 어떤 영화가 ‘인생의 영화’씩이나 될 수 있는 거야? (영) 어릴 때 아버지 손 붙잡고 본 첫 영화라든지 극장 개구멍으로 들어가서 봤다든지 뭐 그딴 식의 아련한 추억이 묻어 있어야 ‘인생의 영화’쯤 되는 거 아냐?

(준) 난 아버지하고 안 친했는데….

(영) 아버지하고 친한 아들도 있냐?

(준) 뭐 별 거냐, 재밌는 영화가 인생의 영화지…. 근데 재밌는 영화가 뭘까? (영) 캐릭터. 사랑할 수 있는 캐릭터가 등장하는 영화는 다 재밌지. (준) 음… 언제나 해답은 사람이군.

(영) 줄리언 무어. 그 여자는, 기미낀 몸뚱어리 자체가 캐릭터야. 그녀의 기미낀 얼굴에는 ‘생활’이 보여. 그래서 그녀가 영화에서 아무리 시니컬하고 싸가지 없어도 모두 설명이 돼. <쉬핑뉴스>도, <매그놀리아>에서도, 긴 설명 필요없거든. 그냥 ‘기미’ 하나면 돼.

(준) <쉬핑뉴스>에서 주디 덴치도 죽였어. 오빠 유골에 오줌 갈기는 장면에서 뻑 갔지. 그러고보면 할스트롬은 ‘사람’ 이야기를 기똥차게 하는 것 같아.

(영) 오줌 하니까 <엑소시스트> 생각나네.

(준) 중학교 때 AFKN에서 첨 봤다. 카펫에 오줌 갈기는 장면, 십자가로 자위하는 장면…. 그때부터 내가 공부를 멀리 했지.

(영) <엑소시스트>에서 가장 인상적인 캐릭터는 형사야. 그 쓸데없는 수다들. 영화와는 무관한 잡소리. 그게 더 기묘한 긴장감을 일으키잖아.

(준) 그래도 ‘내 인생의 영화’라기엔 어째 유니크한 맛이 떨어진다. (영) 그래도 <전함 포템킨>이나 <시민 케인>보단 낫잖아.

(준) 나 <시민 케인> 안 봤는데. (영) 그러냐? 기본이 안 됐구먼. 짝퉁이야, 짝퉁.

(영) <다이 하드>의 존 맥클레인은 내 최고의 우상이었어. 1편에서 수건으로 겨드랑이 훑는 장면이 있는데, 그게 그렇게 멋있어 보이더라구. 이상하게.

(준) 겨드랑이 하니까 <워킹걸>의 해리슨 포드도 기억난다. 사무실에서 밤샌 뒤 커피포트 물로 겨드랑이 쓱쓱 닦고 셔츠 갈아입잖아. 캐릭터와 영화 컨셉을 함축하는 장면이지.

(영) 겨드랑이 땀은 뭐니뭐니해도 스페인 축구대표팀 감독이야.

(준) 음. 크게 젖었었지.

(영) 시큼하다. 그만하자. 겨드랑이로 ‘내 인생의 영화’를 정할 순 없다.

(준) <우묵배미의 사랑> 최명길. 왜 여관에서 양말 빨잖아. 그 한 장면으로 그 여자의 모든 게 다 보여. 남루함. 아름다움. 심지어 슬프기까지 하더라니까.

(영) <오디션>의 그 여자. 머리 풀고 앉아서 오직 전화만 기다리잖아. 밥도 안 먹고. 화장실도 안 갔을 거야, 아마. 그 지독함이 플롯의 원동력이지.

(준) <오디션>은 무서운 영화가 아니라 슬픈 영화다. 흑.

(영) 진짜 무서운 영화는 <터미네이터>야. 죽어라 쫓는 머리 빈 미스터 유니버스. 그 이상의 캐릭터가 또 있겠냐.

(준) 코언의 캐릭터는 모두 훌륭해. 레보스키 봐봐. 진짜 <위대한 레보스키>잖아.

(영) 다케시 것도 다 훌륭해. 비슷한데, 전부 달라. 죄다 위대해.

(준)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는 영화 캐릭터에 한 획을 그었고.

(영) 주성치.

(준) 죽이지.

(영) 우디 앨런.

(준) 꽥.

(영) 이제 그만 정하자. 목 아프다.

(준) 그거야, 이미 정해져 있는 거 아니야?

(영) 맥스군?

(준) 그럼 맥스말고 더 있어?

(영) 없지. 맥스 피셔가 최고지. 가장 미우면서도 가장 사랑스럽고, 아주 경솔하면서도 아주 진중한…. 그건 ‘설정’할 수 있는 캐릭터가 아니야.

(준) 권태와 외로움이 뚝뚝 묻어나는 블룸도 좋고, 늘 옆이 비어 보이는 로즈마리도 좋지. 이 영화의 뛰어난 정서는 그들이 뿜어내는 기묘한 코미디, 그 아우라야.

(영) 나는 블룸이 로즈마리 집 앞에서 당근을 씹는 장면이 정말 좋아. 오도독오도독. 그 당근 먹는 얼굴 때문에 로즈마리는 블룸을 좋아했을 것 같아.

(준) 맥스가 로즈마리한테 키스하려고 덤비는 장면 있잖아. 그게 영화에서 제일 웃긴데, 제일 슬퍼. 맥스는 절실한데 뜻대로 안 되잖아. 절실한데 안 되는 것만큼 슬픈 게 또 있을까.

(영) 그 세 캐릭터는 각자 멋대로 움직여. 메인 플롯을 끌고 가는 데에는 무관심해 보일 정도야. 변화무쌍하달까. 그런데도 산만하지 않고 중심이 확실해. 뛰어난 캐릭터의 힘이지.

(준) 놀라운 건, 그렇게 많은 이야기의 러닝타임이 93분에 불과한데 각자의 상처가 치유되고, 화해하고, 그들이 성장한다는 거야.

(영) 이 영화엔 모든 게 다 담겨 있어. 웃기고, 슬프고, 아름답고, 스산하고, 외롭고… 아… 우린 언제 이런 거 쓰냐?

(준) …내일 쓰지 뭐.

(영) 그치? 오늘은 너무 늦었지?

(영) …근데, 너 진짜 <시민 케인> 안 봤냐?

(준) 쩝 …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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