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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싸워 이기소서!

늦은 밤, 언제고 영화에 한번 써먹겠다는 요량으로 여기저기 난필로 적어 어질러놓은 자료들을 정리하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여보세요… 를 연발하는데 잘 모르는 남자 목소리였다. 익지 않는 목소리기도 했지만 이 늦은 시각에 여자도 아니고… 여자가 아니라면 잘 아는 사이래도 별반 통화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 “됐어요!” 하고 끊어버렸다.

그리고 다시 펜을 긁적이는데 또다시 벨이 울렸고 혹 기대하지 않았던 무슨 좋은 쾌라도 있을까 해서 아까와는 사뭇 다른 태도로 전화를 받았다. 술집인지 특유의 소음이 들렸고 살짝 술에 젖은 가느다랗고 낮은 목소리가 “김 작가냐?” 하고 물어왔다. 그렇다고 했더니 이내 낮은 목소리가 풀어지면서 “해곤아, 나야 나. 현남섭! ” 하는데 그 이름만으로도 가슴이 울컥해져왔다. “시발, 형 어디야? 내 바로 날아가버릴라니까!” 하는데 “아니다. 날으려 하지 마라. 오늘은 그냥 네 목소리만 들으면 된다. 연락 못해 미안하고 건강하지? 나는 잘있고 형이 무능해서 너한테 도움도 못되고…. 술마시다 그냥 네 생각나서 전화했다. 다음에 내 맘편한 날 연락할 테니 그때나 만나 한잔 하자“는 것이다. 그러지 말고 일단 만나서 얘기 좀 하자고 아무리 요설을 풀어도 요지부동, 거의 일방적이다 싶게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렇게 하나마나 한 소리 할 바엔 아예 전화하지도 말지 하며 투덜대고 있는데 그 무능 운운하던 목소리의 여운이 길게 이어져 더이상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현남섭!

그는 흥행에서 개박살난 <굳세어라 금순아!>의 감독이다.

지금은 우리 가슴속, 상징으로만 남은 다정스럽고 정겨운 옛 충무로 거리를 거닐던 마지막 세대에 속했던 그는, 그런 대로 잘 나가던 시나리오 작가였다. 지금으로부터 10년도 더 지난 어느 여름날, 배우로서 싹수가 놀놀했던 내가 유일하게 영화쪽의 끈을 유지하고 있었던 데가 ‘영화인 야구단’이었는데(<개같은 날의 오후>를 연출했던 이민용 감독이 주도했던) 거기서 나는 유격수를 맡아 부지런히 땀흘리던 그를 알게 되었다. 배우라는 게 원래 택함받는(?) 업이고보면 그 누구도 나를 뽑아주지 않는 원망스러움에 내심 잔뜩 속이 뒤틀려 있던 내게 그는 그 선하고 순한 눈빛을 이따금씩 건넸고 그 눈웃음만으로도 내 질시와 미움의 심정들은 금방 순해지고 교화되었다. 내가 술자리에서 ‘충무로 마피아’,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유태집단’등등… 근거도 없이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씹고 폄하했던 영화아카데미(지금은 단연코 그렇게 생각 안 함, 그때는 아무나 그렇게 시비걸고 트집잡고 싶었음)에서 그도 공부했고 그 밑천으로 죽어라 습작만 하고 있다고 했을 때 야구팀은 해체되었고 근 10여년의 세월을 각자 서로 무관히 살아왔다. 그리움은 물론 전혀 궁금해하지도 않으면서….

그러다가 내가 어느 영화사에서 캐스팅 제의를 받고 감독실을 똑똑 거렸을 때 수줍게 웃으며 두팔을 벌려오는 이가 있었는데 그이가 바로 현남섭 감독이었다. “작품 내용의 진정성”과는 아랑곳없이 영화서적 밑줄 쳐서 읽고 암기한 사람들의 내공을 따를 길 없어 오랜 숙고 끝에 길을 바꾼 것이었다. 내가 정리한 그의 변으로 볼때….

좋은 시나리오였음에도 불구하고 요즘 영화계의 절대가치인 대박을 못해냈으므로 결국 그는 실패했다(실패했으므로 그 책 또한 좋지 않았을 거라고 씨부리는 사람 있다면 당장에 입 닥쳐라! 얼굴에다 확 가래침 뱉어버리기 전에…. 적어도 그는 흥행에 눈먼 오늘날의 우리처럼 천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가 저지른 단 한번의 흥행 실패가 그의 안부를 걱정하며 만나달라 간청하는 후배의 애원을 매몰스레 물리치며 피해다닐 만큼 무슨 대역죄에라도 해당된단 말인가?

현남섭 감독님!

당신의 상심을 치유할 그 무엇이, 무심히 흐르는 세월이래도 관계없고, 인동을 뚫어 인간의 봄을 만들어내는 불멸의 의지여도 상관없지만, 또 당신이 스스로에 대해 아무리 진지하게 자학하고 냉소하여도 나는 도무지 당신의 무능이 믿어지지 않으니 그렇게 숨어 있지만 말고 차라리 이 척박한 광야로 다시 나서서 정면으로 맞장뜨고, “한번의 성과에 낙담치 않고 정면으로 맞서 끝까지 싸워 이겼노라”는 귀한 본을 후배들에게 되물림해주소서.

당신의 영화 제목처럼 진짜로 굳세게!!!김해곤/ <파이란><블루> 시나리오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