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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 아홉번 봤다꼬? 제정신이가? <사운드 오브 뮤직>
2003-03-06

등장인물 - 큰누나(1955년생), 나(1966년생)

1977년 겨울 부산의 남포동 극장 거리. 낮.

큰누나. “안 되겠다. 사람이 너무 많다.” 나. “표가 없나?” 큰누나. “그래. 딴 거 보자.” 나. “딴 거 뭐?” 큰누나. “부산극장에 <타워링> 하네.” 나. “어떤 영환데?” 큰누나. “불구경하는 영화다.” 나. “엊그제 옆집 솜공장에 불 나가꼬 시껍해놓고 또 불이 구경하고 싶나?” 큰누나. “그거하고는 쪼매 다를 기야. 야튼 <전자인간 337>보다는 재밌을걸.”

부산극장 앞. 밤.

큰누나. “어떻더노?” 나. “지기더라. 재미있어 죽을 뿐했다. 소방대장 글마 그거 누고?” 큰누나. “스티브 매퀸. 멋있제?” 나. “지기더라. 건축기사 글마 그거는 또 누고?” 큰누나. “폴 뉴먼. 멋있제?” 나. “지기더라. 지만 살라 카다가 죽어삐는 비겁한 글마 빼놓고는 다 멋있더라.” 큰누나. “로버트 와그너라 카는 사람이다.” 나. “고양이 구해주는 시꺼먼 글마는 또 누고?” 큰누나. “O. J. 심슨이라는 사람이다. 진짜 배우는 아이고, 미식축구 했다 카더라.” 나. “누나야, 혹시 글마가 나중에 큰 사고 칠 것 같은 그런 예감 안 드나?” 큰누나. “니도 느낏나…?”

1979년 여름 나의 집. 낮.

나. “학교 다녀왔습니다.” 큰누나. “왔나?” 나. “집에 누나 혼자뿐이가?” 큰누나. “그래. 전부 다 나가뿟다. 그건 그렇고 니 잠시 내하고 어데 좀 가자.” 나. “어덴데?” 큰누나. “가보머 안다.”

삼성극장 앞. 낮.

나. “영화 보자꼬?” 큰누나. “싫나?” 나. “어데. 좋아서 하는 소리지. 먼 영환데?” 큰누나. “<사운드 오브 뮤직>. 나는 벌써 이거 아홉 번째다.” 나. “뭐 하는 영환데?” 큰누나. “노래 부르는 영화다.” 나. “그거를 아홉번 밨다꼬? 제정신이가?” 큰누나. “한번 바바라. 제정신인가 아인가….”

삼성극장 앞. 밤.

큰누나. “어떻더노?” 나. “말도 몬하게 재밌더라. 노래도 너무 좋고, 신나 죽겠더라.” 큰누나. “그럴 줄 알았다. 집에 가자. 레코드 들리주께.” 나. “레코드도 있나?” 큰누나. “그래. 오리지널 사운드트랙이라 카는 기다.” 나. “그기 먼데?” 큰누나. “노래들을 영화에서 나온 그대로 녹음해놓은 기다.”

집의 누나 방. 밤.

큰누나. “영화하고 똑같제?” 나. “지긴다. 영화 한번 더 보는 거 같다.” 큰누나. “유준아.” 나. “와?” 큰누나. “내 내일 시집가는 거 알제?” 나. “안다.” 큰누나. “어떻노? 좋나?” 나. “모르겠다. 기분이 이상하다. … 안 좋다.” 큰누나. “집에 자주 놀러오께.” 나. “영화도 또 보이도.” 큰누나. “울지 마라. 누나 시집간다는데 울기는 와 우노?” 나. “시집가는 사람이 우니까 따라 우는 기지.”

1994년 김포공항. 낮.

나. “뉴질랜드까지 얼마나 걸리노?” 큰누나. “몰라.… 인자 헤어지머 언제 또 볼지 모르겠네.” 나. “신혼여행 글로 가머 안 대나. 울지 마라. 좋은 나라 가는 사람이 와 우노.” 큰누나. “그라는 니는 나쁜 나라 남아 있어서 우는 모양이지?” 나. “아지매가 우니까 쪽팔리서 우는 기지 나쁜 나라는 무슨….”

2003년 봄. 정동의 어느 사무실.

나. “영화 이야기를 쓰라니 뉴질랜드로 이민 가신 큰누나가 생각난다. 가치관을 뒤흔든 숱한 영화들을 놔두고 ‘내 인생의 영화’로 큰누나와 본 몇편이 떠오르는 것은, 내가 아직도 ‘영화 그 자체’보다 영화로 인한 추억을 더 소중히 하고 있다는 증거이리라. 신혼여행으로 그리 간다 했지만, 약속을 아직 지키지 못하고 있으니 안타깝다. 끝으로, 오해할까 드리는 말씀인데, O. J. 심슨에 관한 대화에는 ‘뻥’이 좀 섞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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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준/ <에스콰이어> 수석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