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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사 신문 제8호(1922~1924) [2]
이유란 2003-03-08

영화사신문이 만난 사람 | 버스터 키튼 인터뷰

“새로운 개그가 없으면 어쩌지, 가끔 두렵다”

1924년에 개봉한 영화 <셜록 주니어>는, 참 잊기 힘든 웃음과 따뜻함을 지닌 영화다. 버스터 키튼이 감독, 출연한 이 영화는 평소 탐정을 꿈꾸는 별볼일 없는 영사기사가 스크린 속 세계에서는 멋진 탐정이 되어 활약한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사랑하는 여인에게 도둑으로 몰려 낙담에 빠진 주인공은 영사실에서 잠이 든다. 이때 그의 분신이 스르르 일어나 스크린 속으로 걸어들어가는데,

거기에서 그는 재치와 용기로 도난사건을 해결하고 사랑하는 여인을 위기에서 구한다. 키튼은 대중이 영화에 원하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은 꿈이고 희망이다. 소박하고 사심없는. 버스터 키튼은 요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셜록 주니어> 이외에도 최근에 발표된 영화들인 <네비게이터> <우리의 환대> 등에서 그의 코미디 감각은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자그마한 육체로 달리고 떨어지고 넘어지면서, 그리고 스스로는 단 한번도 웃지 않으면서, 그는 우리를 웃긴다. 이제 무표정한 얼굴은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대체 어떻게 웃지 않을 수 있는 거지? 그를 만나 우선 그것부터 물어봤다.

웃음을 참기 어렵지 않나.

→ 가끔은 그렇다. 그때마다 필라델피아에서 있었던 일을 기억한다. 거리퍼레이드를 할 때였는데, 꼬마녀석들이 몰려와서는 ‘왜 웃지 않지? 발을 걸어 넘어뜨리면 웃을 거야’ 등등 떠들어댔다. 그땐 정말 웃음을 참기가 힘들었지만 결국 웃지 않았다. 보드빌에서 부모님과 함께 공연했던 어린 시절, 아버지는 절대 웃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 그때의 습관이 몸에 밴 것 같다.

보드빌 공연은 얼마 동안 했나.

→ 세살 때부터 보드빌 무대에 서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우리를 ‘스리 키튼’이라고 불렀다. 아버지의 아이디어는 나를 배경에 내붙이는 것이었다. 나는 인간걸레처럼 팽개쳐졌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게 재미있었다. 지금도 아무도 떨어지지 않는 영화는 재미없다. 개그는 자연스러울 수도 있고 기계적일 수도 있다. 둘 다 웃음을 유발한다. 하지만 자연스러운 개그는 우리가 밤에 깬 채 누워서 꿈을 꾸려고 하는 것처럼 어렵다. 내겐 그냥 코미디보다 슬랩스틱 코미디가 맞는다.

우편엽서에 시나리오를 쓰는 것으로 유명하던데.

→ 내게 시나리오는 별거 아니다. 세트를 짓고 개그를 끌어내기 위해 필요한 줄거리만 충분히 알고 있으면 된다. 모든 건 촬영 중에 이루어진다. 상영시간의 6배 정도를 촬영했다고 판단되면 촬영한 필름을 편집해서 스토리가 될 만한 것들만 추려낸다. 그렇게 해서 한편의 영화를 완성한다.

늘 아이디어가 넘쳐난다. 비결은.

→ 꼭 그렇지도 않다. 모든 개그를 다 써 더이상 새로운 방법이 없는 날이 오지 않을까, 가끔 두렵다. 코미디언은 그렇게 끝장나는 걸 경계한다. 그 때문에 채플린은 그렇게 천천히 영화를 만드는 걸 거다. 그는 영화마다 수천자의 필름을 찍어서는 한번 영사하고는 폐기한다. 그러한 헛수고가 그러나, 그를 위대한 예술가로 만든다.

궁핍한 삶에도 행복은 있다

<마지막 웃음>, 하층계급 그린 실내극 ‘카머스피엘’ 변주 눈길

1924년, 독일 안팎에서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무르나우 감독의 신작 <마지막 웃음>은 카머스피엘의 룰을 ‘배신’한 카머스피엘 영화다. 왜 배신인가 하면, 영화 결말에 가서 주인공이 뜻밖에 행복해지기 때문이다. 실내극을 뜻하는 카머스피엘은 종전 뒤 박탈감과 궁핍에 시달리는 하층계급의 삶을 그린 장르로, <파편>(1921년), <실베스터>(1923년)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카머스피엘’이란 용어는 연극연출가인 막스 라인하르트가 소수의 관객을 대상으로 친밀하게 연극을 공연하기 위해 1906년 개관한 카머스피엘레 극장에서 유래했다.

이 영화들은 언제나 불행으로 끝난다. 사회와 운명이 야기한 삶의 위기는 극복되지 못하고 죽음을 불러온다. 그런데, <마지막 웃음>은 예외다. 이 영화도 비애로 가득 차 있다. 호텔 도어맨인 주인공은 늙었다는 이유로 하루 아침에 화장실 조수로 밀려난다. 이는 그에게 삶, 그 자체의 상실을 의미한다. 그런데 결말에 가서 엄청난 반전이 일어난다. 주인공이 갑작스런 상속으로 백만장자가 되어 모두의 부러움을 사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결말은 제작자인 에리히 폼머가 유도한 것이었다. 카머스피엘의 불행한 결말과 폐쇄공포증적 분위기에 질려 있던 폼머는 시나리오 작가인 칼 마이어에게 ‘해피 엔딩’을 첨가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한 결말 덕분인지 <마지막 웃음>은 카머스피엘 중 최고의 흥행수익을 올리고 있다.

한편, 평론가들은 형식적 탁월함 때문에 이 영화에 주목하고 있다. 특히 ‘날아다니는 카메라’가 인상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지금까지 돌리나 크레인숏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마지막 웃음>처럼 뒤로 앞으로, 위로 아래로, 이쪽에서 저쪽으로 자유롭게 이동하는 카메라의 움직임은 없었다는 것이다. 주인공이 ‘마음의 눈’으로 본 세상을 고스란히 담은 주관적인 카메라 또한 찬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용어사전- 포토제니인상주의영화의 핵심

‘포토제니’(photoge(e 위에’)nie)란 단어를 아십니까? ‘사진적인’이란 사전적 뜻을 갖는 이 단어가 전후 프랑스에 등장한 새로운 경향의 영화, 이른바 인상주의영화의 핵심을 요약하는 용어로 회자되고 있다. 루이 델뤽, 아벨 강스, 장 엡스탱, 제르맹 뒬락 등 새롭게 등장한 일군의 영화인에게 포토제니는 사진적인 것 이상을 의미한다. 그들에겐 포토제니야말로 영화의 기본 토대다.

포토제니란 단어를 대중화한 사람은 루이 델뤽이었다. 그는 촬영된 대상과 촬영한 필름을 구분하는 특성을 정의하기 위해 이 용어를 사용했다. 델뤽에 따르면 영화화의 과정은 한 사물에 새로운 표현성을 부여하고, 이로써 관객에게 그 사물에 대한 신선한 감각을 제공해준다.

장 엡스탱은 이러한 델뤽의 논의를 더욱 정교화해 1924년 ‘포토제니의 특성에 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엡스탕에 따르면 포토제니는 영화가 갖는 예술성, 그 자체다. 포토제닉한 요소를 갖게 될 때 영화는 영화다워진다. 따라서 포토제니는 영화의 가장 순수한 표현이다. 그러므로 감독은 포토제니를 담아 해야 하는데, 이는 3차원의 공간과 또 하나의 차원인 시간에 놓인 사물의 변화를 포착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렇게 포착된 사물은 사물, 그 자체를 넘어선다. 곧 서랍에 놓인 총은, 그저 총이 아니라 타살, 자살, 범죄의 욕망을 의미하고, 클로즈업으로 잡힌 눈은 그 사람의 퍼스낼리티를 나타내는 것이다. 카메라 렌즈는 이렇게 해서 사물의 본질을 드러낸다. 동시에 이럴 수 있을 때라야 특정 사물은 스크린에 등장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자연과 사물은 인간이 상상하는 대로의 퍼스낼리티는 갖는다는 것이다. 내가 기쁘면 세상도 기쁘고 내가 슬프면 세상도 슬프다는 것이다. 세상은 인간이 보는 대로 존재한다. 따라서 보는 자, 곧 영화감독이 세상에 대해 갖는 ‘인상’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이를 담아냄으로써 영화는 일상의 리얼리티와는 다른 새로운 리얼리티를 창조할 수 있다. 그러한 이유에서 영화는 희망적인 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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