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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제임스 딘, 호르스트 부흐홀츠 타계

호르스트 부흐홀츠(Horst Buchholz). 그는 독일판 제임스 딘으로 불리며 한때 뭇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배우로 세계적 스타의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그 이름을 기억하는 독자가 얼마나 될까? 혹 헨리 북홀트라는 미국식 이름을 댄다면?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그의 마지막 작품을 언급해보자. 로베르토 베니니의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베니니가 서빙하는 레스토랑을 찾아와 선문답을 주고받던 나치장교 레싱 박사가 바로 부흐홀츠란 “세계적” 독일 배우다.

1933년 베를린 노동자 거주지역에서 구두 수선공의 아들로 태어난 부흐홀츠는 궁핍했던 전후시대 길거리에서 빵을 훔치던 양아치였다. 곱상한 얼굴 덕분에 1950년대 베를린 연극계를 주도하던 메트로폴극장 감독에게 길에서 픽업되는 행운을 잡았지만, 수년간 엑스트라 신세를 면치 못했다. 길이 트이게 된 것 역시 삐딱하면서도 수려한 용모(그는 바비의 남자친구 캔 인형의 원조쯤 되는 독일 인형의 모델이다) 덕분으로 ‘넘버 투’로 번역하면 딱이라 할 프레디 보르헤르트 감독의 <반쯤 힘있는 자들>(1956)의 주연으로 캐스팅됐다. 그뒤로 지난 3월3일 70살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평생 그를 따라다닌 수식어가 “독일판 제임스 딘”이다.

기성세대에 반항하는, 그렇다고 딱히 이유나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닌, 허무주의 청춘상으로 갑자기 떠버린 부흐홀츠에게 국제적 커리어는 보장된 것처럼 보였다. 스스로도 미국 진출을 소망하던 차에 스티브 매킨, 율 브린너와 더불어 <황야의 7인>(치코 역)이 되기도 했다. 이제 한번 더 검증된다면 헐리우드에서 자리를 굳힐 참이었다. 마침 독일 출신인 빌리 와일더 감독이 제임스 딘보다 훨씬 곱상하면서도 훨씬 양아치적인 부흐홀츠의 가능성을 찍었다. 그리고 분단된 베를린을 배경으로 코카콜라가 대변하는 미국 자본주의를 비꼬는 <하나·둘·셋>을 촬영했다. 부흐홀츠는 여기서 확고부동한 공산주의자이면서도 코카콜라 베를린 지사장의 딸을 사랑하는, 흔들리는 청춘을 열연했다.

그러나 크랭크업도 하기 전에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는 대사건이 벌어졌다. 삼엄한 분위기 속에 독일 분단을 코믹하게 다룬 작품이 먹힐 리 없었다. 제작진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지만 그래도 이 작품은 수년 뒤 지각 개봉되어 대히트를 쳤고, 감독에게 뒤늦은 영광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이 영화가 대박을 터뜨렸을 때 부흐홀츠는 더이상 극중의 청춘이 아니었다. 스크린 위의 독일판 제임스 딘은 이미 아저씨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일생일대의 기회는 사라졌지만 그는 이후 할리우드에서 대작 수십편에 출연할 수 있었다. 단골 역은 나치 장교. 마르코 폴로, 세르반테스, 요한 스트라우스를 연기하며 유럽에서는 사극 전문배우로 이름을 날렸지만, 미국에서는 여전히 나치 전문 배우일 뿐이었다. 빔 벤더스 감독이 친구의 오명을 벗겨주기 위해 <그 멀고도 가까운>에 노후한 미국 출신 갱으로 출연시켰지만 굳어진 이미지는 쉽게 뒤집어지지 않았다. 생전 부흐홀츠는 나치로 대변되는 독일 기성세대에 반항하는 청춘으로 유명해진 자신이 할리우드에서는 나치 단골배우로 낙인찍힌 사실을 스스로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표현하곤 했다.

<인생은 아름다워>의 레싱 박사, 알고 보면 선한 사람이다. 유대인에 대한 적의도 없다. 오히려 총기발랄한 베니니를 좋아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의 죄악은 우유부단함이다. 사악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억울한 처지의 사람들을 돕지도 않는다. 혼자 선문답이나 중얼거리며 외면할 뿐. 부흐홀츠가 이유없이 반항하던 시절에도 얼굴에는 좌절감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이런 좌절감은 노인이 된 레싱 박사에게서도 마찬가지였다. 20대의 좌절감이 나치와 기성세대를 부정하는 독일 청년의 갑갑한 심정이었다면, 나치의 정체를 알면서도 침묵했던 20세기 전반 독일 시민들의 비겁한 포기야말로 60대의 부흐홀츠로 대변된 좌절이라고 하겠다. 베를린=진화영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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