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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싼 만큼, 재미 없어!
2001-05-02

게임과 돈

게임이 애들 장난이 아니라 당당한 산업으로 주목받게 되면서 ‘자본의 논리’가 자연스럽게 따라붙었다. 식어가는 벤처투자 열풍 속에서도 게임은 아직 어느 정도 인기를 끌고 있다. 게임에 관심있는 몇십억, 몇백억원의 돈에 많은 사람들이 달려든다. 어디나 그렇지만 제대로 된 사람들보다는 돈만 노리는 사람들이 더 많다.

거짓말로 쉽게 돈을 벌어보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아직 게임전문가가 별로 없어서 그런지 말도 안 되는 사기극으로 돈을 타내려고 든다. 얼마 전 일본에서 발표된 게임을 그대로 베낀 기획안을 가져와서는 ‘세계 최초’ 운운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엉터리 재무제표를 당당히 첨부해놓는다. 하지만 그런 큰돈이 걸린 투자심사의 심사위원들은 최소한 한두 분야의 전문가들이다. 간단한 질문 몇번이면 거짓말은 금방 탄로가 나고, 얼굴이 시뻘게져서 말도 안 되는 변명만 늘어놓는다. 이렇게 뻔히 걸릴 걸 내놓는 회사들은 아직은 순진한 편이다. 투자 요구도 ‘소박하게’ 10억원 안팎이다.

통 큰 사람들은 따로 있다. 이들은 미디어를 능숙하게 활용할 줄 안다. 호텔 같은 호화로운 장소에서 투자설명회를 개최하고, 투자심사 때 이 기사가 실린 신문을 자료로 제출한다. 일반인도 알 만한 세계 최고의 유통사가 전략적 제휴업체로 거론되기도 한다. 이때의 증빙자료도 역시 신문기사다. 부쩍 늘어난 IT난 한면을 통째로 도배하는 걸 보면 ‘아 이 회사는 벌써 세계적 업체구나’ 하는 생각이 들 법도 하다. 하지만 기사만으로는 증빙자료가 될 수 없다. 회사쪽에서 보낸 보도자료가 거의 토씨 하나 안 고치고 기사화되는 일이 드물지 않다. 게임업계 사정에 밝은 전문 기자들이라면 사정이 다르다. 친한 업체쪽에 힘을 실어주는 일이 없는 건 아니지만 10을 100으로 부풀려 쓰는 일은 없다. 하지만 그냥 IT난 담당으로 게임에 대해 전혀 모르는 기자라면 보도자료만 가지고 기사를 작성하는 일이 많다. 그래서 하청작업을 맡은 게 자체 제작인 것처럼 뒤집히기도 하고, 기사만 보다보면 우리나라에 세계적 게임업체가 꽤 많은 것처럼 느껴지곤 한다. 이런 업체들일수록 게임 하나에 통 크게 20, 30억원의 돈을 요구한다.

물론 투자에는 어차피 위험이 있는 것이고, 혹시 하나라도 제대로 터지면 수십, 수백배의 수익을 올릴지도 모른다. 어찌보면 속은 사람들이 바보지 게임업체만 특별히 비도덕적이라고 욕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정작 제대로 된 게임을 만들 수 있는 팀들이 사라져 간다. 게임을 진짜로 만들고 싶어하는 친구들, 다른 게이머와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건 ‘기껏’ 3천만, 4천만원 정도다. 그러나 정작 이들에게 갈 돈은 없다. 세상 물정 모르고 게임만 아는 사람들이 무슨 수로 미디어를 이용하고 학벌을 동원하고 유력인사를 끌어들이겠는가.

20, 30억원짜리 국산 게임들이 나오기 시작했지만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50만원 월급으로 버티는 제작자들도 많다. 들어간 돈은 차이가 많이 나지만 결과물인 게임에는 기껏해야 화려한 동영상의 차이 정도밖에 없다. 이런 세상에서 게임 제작자들이 선택할 길은 두 가지다. 누가 뭐라도 신경쓰지 말고 좋은 게임 만드는 데만 삶을 거는 방법이 있고, 게임보다는 세상 사는 법을 열심히 배우고 익혀, 게임 기획할 시간에 이 사람 저 사람 찾아다니며 인사하고 안면을 쌓는 길을 선택할 수도 있다. 두 번째 길이 첫 번째 길보다 백배는 쉽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게임은 천배나 보잘것없다.

박상우 | 게임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