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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존재하는 역사의 상처,<레전드 오브 리타>

■ Story

독일이 두개의 이름으로 불리던 시절. 1970년대. 서독의 적군파(RAF), 리타와 앤디는 테러운동을 벌인다. 본의 아니게 살인이 일어나고 그들은 도망자가 된다. 리타는 동독 정부의 비밀요원 에빈의 도움으로 가명을 써가며 생활을 이어간다. 점점 더 멀어지는 리타와 앤디의 관계. 수잔나로 이름을 바꿔 공장에 취직한 리타는 타탸나와 우정을 쌓아간다. 그 즈음 국경을 넘으려다 사살된 앤디의 얘기가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온다. 리타 역시 주변 사람들에게 신분이 탄로나 다시 이름을 바꾸고 거처를 옮긴다. 캠프관리 교사 사비나로 신분을 바꾼 리타는 물리학도 요헨과 연인이 된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쫓기기 시작한다.

■ Review

그녀의 본명은 ‘리타’다. 하지만 그녀를 살아남도록 해주는 가명은 수잔나와 사비나다. 무엇이 그녀에게 숨겨야 할 이름과 숨기 위한 이름을 가져야만 하도록 만들었는가. <레전드 오브 리타>는 그 거둘 수 없는 운명에 관한 영화이다(‘레전드’는 동독의 비밀경찰들이 신분조작을 가리켜 사용했던 은어라고 한다).

서독의 남자(앤디)와 동독의 남자(요헨) 둘 모두 그녀를 버렸고, 두개의 국가 서독과 동독도 그녀를 버렸다.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그렇게 들뜬 통일의 기쁨이 서로를 얼싸안게 할 때, 정작 리타의 자리는 남겨진 그 잔해 아래 묻혀버린다. 신분조작까지도 도맡아 해주던 동독 정부가 그녀를 더이상 보호하지 않기로 결정하면서, 서독의 적군파로 활동하던 리타는 두 정부 사이의 불온했던 과거를 청산하는 폐기서류 정도가 되고 만다. 이것은 그녀의 끝을 의미한다. 이제 그 어디에도 거처를 호소할 곳이 없는 것이다.

염색공장에서 만난 친구 타탸나를 통해, 그리고 비록 떠나가버렸지만 한때 그녀에게 애정을 쏟아주었던 요헨을 통해, 리타는 이데올로기의 감옥을 벗어나 보통 사람들의 가정으로 들어서기를 희망한다. 염색공장 노동자 수잔나, 캠프교사 사비나로 살아가던 도피의 길에서 그녀의 안식처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그들에게서 느끼던 사랑이었다. 그러나, 허망하면서도, 갑작스러운, 또는 되돌아갈 수도 없는 그녀의 마지막 선택. 이데올로기가 화해하고, 역사가 화합하는 순간에, 리타는 존재할 곳을 잃어버린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그렇게 통일의 뒤안길에 남겨진 사람이 있음을 슬프게 기억한다. 모두가 술잔에 기쁨을 담아 마실 때, 어딘가 에는 그 역사의 상처가 뒹굴고 있을 것임을 폴커 슐뢴도르프는 주인공 리타의 삶을 통해 역설하고 있다.

실존했던 1970년대 독일의 적군파 테러리스트 잉게 비트를 모델로 한 <레전드 오브 리타>는 소재에서 슐뢴도르프의 초기작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와 비슷하다. 하지만 그 시기에 폴커 슐뢴도르프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던 <양철북>의 분위기와는 거리가 있다. 성장을 멈추기로 결심한 늙은 아이의 우스꽝스러우면서도 기괴한 역사, <양철북>으로 1979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폴커 슐뢴도르프는 새 영화 <레전드 오브 리타>를 침묵처럼 조용한 양식으로 담아냈다. 그러나 한없이 낮아진 그 양식 안에는 돌아보기 두려운 역사의 숨결이 담겨 있다. 정한석 기자 mapp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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