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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아름다운 육체의 늙음이여!<용형호제2>
2003-04-03

안녕하세요? <씨네21>의 ‘인기필자’ 김은형의 친구 김소희입니다(독자께서는 그녀의 글에 온갖 기상천외한 몰골로 등장하는 “내 친구” 역을 기억하시지요?)

김은형은 제 영화 컨설턴트이기도 합니다. 그녀가 저를 끌고 시사회장에 다니는 이유는 순전히 혼자 가기 심심하거나 중간에 졸았을 때 줄거리를 끼워맞추기 위해서지만, 저는 꿋꿋이 따라갑니다. 공짜니까요. 물론 그녀가 처음부터 컨설팅을 한 것은 아닙니다. 몇편의 ‘예술영화’에서 제가 자다가 의자 밑으로 굴러떨어지거나 20분 경과 뒤 “참을 만큼 참았어!”라고 저도 모르게 소리지르며 뛰쳐나가는 걸 목격한 뒤부터 아무 영화나 보자고 하지는 않습니다. 대신 제가 즐겁게 볼 수 있는 영화의 목록을 짜서 줍니다. 최근 그녀가 권고한 영화는 <샹하이 나이츠>였습니다. “<미녀 삼총사>에 버금가는 재미와 감동을 네게 줄 것이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저는 영화를 온몸으로 보는 편입니다. 감동적인 장면은 꼭 따라해봅니다. <미녀 삼총사>를 본 직후 극장 쓰레기통을 오른발로 차고 올라가 공중제비 돌기 직전까지의 폼을 잡는 데 성공했습니다. 발바닥을 세우고 다리를 마름모꼴로 벌려 앉은 뒤 양팔을 앞뒤로 교차시키는 자세는 며칠간 갈고 닦아 아주 잘합니다(정지동작만을 흉내내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12년 전 <용형호제2>를 보고 “요호~” 하는 기합과 함께 담 타넘기를 시도하다가 전치2주의 상처를 입었거든요).

어느 주말 밤 친구와 손 꼭 잡고 서울 외곽의 한 허름한 극장을 찾았습니다. 이 친구로 말할 것 같으면, 김은형의 글에 등장하는 저보다 더 맥락없는 인생관을 갖고 있는데 우리는 영화 시작 전 “샹하이 나이츠냐 나이트냐”를 놓고 진지한 토론을 했습니다. 이어 숨죽이고 영화를 봤습니다. 중간중간 12살짜리 어린이들에게 올바르지 않는 여성관을 심어주는 대사가 튀긴 하지만 저 자신 12살을 훌쩍 넘긴데다 12살된 자식도 없는 까닭에 그리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저를 숨죽이게 한 것은 경지에 이른 성룡의 무예였습니다.

그는 절대 사람을 죽이지도 다치게 하지도 않습니다. 경찰봉이나 넥타이나 모자 등 주변 집기를 이용해 잠시 결박해놓을 뿐입니다. 평화주의자만이 가질 수 있는 기품이 있습니다. 뭐니뭐니해도 그의 무예엔 가슴 한켠을 아리게 하는 그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왜 그의 다리는 점점 오자로 벌어지고 파트너에 비해 현격한 길이 차이를 보이는 것일까, 심지어 도구로 사용한 우산대보다도 짧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만은 아닙니다.

저는 성룡의 늙음이 좋습니다. 아놀드 슈워제네거처럼 도무지 약을 쓰지 않고서는 만들 수 없을 것 같은 몸으로 근육질을 과시하는 전도된 늙음이 아닌, 처진 눈주름만큼이나 둔한 몸놀림으로 시장판 양아치와 똘마니들을 상대하는 모습이 정직해 보였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오버와 뻥으로 점철된 동작이지만 늙음만이 가질 수 있는 완숙한 리듬이 살아 있습니다. 물론 성룡도 할말이 있겠죠. 그렇지 않고서 이 나이에 무슨 수로 몸을 놀리겠니? 그가 세월에 순응하면서도 최선을 다해 몸연기를 한다는 사실은 영화마다 보너스로 주어지는 NG모음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러시아워2>에서 그는 좁은 창구를 미끌어져 들어가려다 배가 걸려 빠지지 않은 장면을 보여주기도 했죠).

20년 전의 <용소야>를 시작으로 <폴리스스토리> <프로젝트A> <용형호제>에 이르기까지 성룡 영화는 제 10대 시절 성장의 밑거름이었습니다. 튼튼한 체력과 비교적 두꺼운 팔다리를 만드는 데 말입니다. <용형호제2>를 마지막으로 길거리에서 성룡의 동작을 흉내내기가 어려워졌습니다. 사람들은 공포감을 갖거나 혀를 차고 지나갔습니다. 제 몸이 둔해진 만큼 ‘내 인생의 배우’인 성룡의 몸도 둔해졌다는 사실을 목격하는 것은 고통스럽지만 진실을 알아나가는 길입니다.

또하나의 진실을 밝힐까 합니다. 독자 여러분! <씨네21>의 김소희 기자와 저 <한겨레21>의 김소희 기자는 다른 사람입니다. <씨네21>의 김소희 언니는 지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훌륭하시고 영화에 대한 태도와 수준 역시 이 글을 보면 짐작하시겠지만 저와는 비교할 수 없는 분이랍니다. 그러니 제발 “씨네로 가셨더군요. 지금까지와는 다른 글쓰기 기대됩니다”라는 식의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메일 좀 보내지 마세요.

김소희/ <한겨레21>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