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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대적인 환경에서 살아남으려는 적응 노력,<어댑테이션>
김혜리 2003-05-07

■ Story

<존 말코비치 되기>로 명성을 얻은 시나리오 작가 찰리 카우프만(니콜라스 케이지)은 괴짜 난초 수집가 존 라로쉬(크리스 쿠퍼)에 관한 저널리스트 수잔 올리안(메릴 스트립)의 논픽션 <난초도둑>을 각색하라는 주문을 받는다. 소심하고 사색적인 찰리는 각색이 풀리지 않자 신경쇠약을 일으키는데, 찰리의 경박한 쌍둥이 동생 도날드(니콜라스 케이지)는 시나리오 강좌에서 배운 상업영화 공식에 맞춰 써낸 스릴러 각본이 비싼 돈에 팔리는 쾌거를 올린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찰리는 경멸해 온 시나리오 강좌를 청강하고 원작자가 숨긴 진실을 찾기 위해 올리안과 라로쉬의 뒤를 밟는다.

■ Review

포기하자. 아무래도 이보다 간략히 말할 방도는 없다. 그러니까, <어댑테이션>은 작가 찰리 카우프만이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영화의 시나리오 쓰기에 어떻게 실패했는가에 관해 찰리 카우프만이 쓴 시나리오로 만든 영화다. 실제로 <존 말코비치 되기>가 성공한 뒤 <난초도둑>의 각색을 떠맡은 찰리 카우프만은, 이내 자기가 지옥의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밀었음을 깨달았다. <난초도둑>은 훌륭한 책이었지만 그 행간에서 극영화의 스토리를 걸러내는 것은 젤리를 맨손으로 잡으려는 노력만큼 무망했다. 밤마다 광활한 모니터에서는 커서만 외로이 깜박이고, 불면증에 식욕부진까지! 계약금을 돌려주면 안 될까? 내 벗겨진 머리 안에는 독창적인 생각이라곤 하나도 없어! 신음하던 찰리 카우프만의 시나리오에는 어느 순간 자학하는 자신의 일상이 끼어들었다.

결국 카우프만은 두대의 피아노를 치는 연주자처럼, <난초도둑>에 나오는 사연과 ‘찰리 카우프만 되기’의 스토리를 오락가락하며 자판을 두들겼다. 이번에는 “이건 자아도취고 직업적 자살이야! 나는 비참해! 비만하고 비참해!”라고 신음하면서.

그러니까 그게 진짜 찰리 카우프만 이야기냐, 극중 찰리 카우프만 이야기냐 묻는다면 당신은 퍼즐 안에 들어온 것이다(감독이나 작가가 모처럼 벌거벗기로 결단할 때 관객의 머리는 안타깝게도 더 복잡해진다). <어댑테이션>에는 허구의 인물인 찰리의 쌍둥이 도널드 카우프만이 버젓이 엔딩 크레딧에 공동작가로 이름을 올리고 있는가 하면, 작가 찰리 카우프만, 저널리스트 수잔 올리안, 난 수집가 존 라로쉬, 시나리오 강사 맥키 같은 실존 인물들이 허구와 실재가 혼혈된 모습으로 등장하고, 스파이크 존즈와 캐서린 키너가 본인 그대로 출연하는가 하면 커티스 핸슨 감독이 수잔의 남편 역으로 스쳐간다. 카메오조차 묘사하기 쉽지 않다. <어댑테이션>의 존 말코비치는 <존 말코비치 되기> 세트에서 존 말코비치 역으로 분한 존 말코비치를 잠깐 연기한다.

진짜 삶에는 사건이 없다고 말했다가 면박당하는 찰리

나란히 진행되던 카우프만의 이야기와 <난초도둑>의 이야기는 <어댑테이션>의 3막에서 별안간 한 덩이가 된다. 좌절한 찰리는 그때까지 경멸하던 동생과 시나리오 강사의 충고를 받아들이고 <난초도둑>의 저자 수잔의 뒤를 밟다가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액션 클라이맥스를 연출한다. 섹스와 추격전, 악어의 습격에다가 형제간의 눈물겨운 화해까지. 영화 전체가 진부함의 결정체로 변신하며 망가진다. 그럼 찰리는 변절했는가? 아니다. <어댑테이션>은, 저열한 3막은 도널드가 쓴 것이라는 알리바이를 내세우는 한편, 스스로의 영화적 육체를 찰리 카우프만의 작가적 고뇌의 번제물로 바침으로써 순결을 지킨다. 그리고 벼랑에서 산화하는 철저한 자세를 통해 지금까지 나온 수많은 영화에 관한 영화들을 넘어서려고 한다. <어댑테이션>이 제 꼬리를 먹는 뱀의 형상이 된 건, 내용상 존 라로쉬가 채집한 난초에 집착하고 수잔이 존에게 삶의 이상을 투사하고, 찰리가 수잔의 책에 매달리는 관계의 연쇄와도 잘 어울린다. 꼼꼼히 원작을 옮기는 성실한 작가들이 분통 터지게도 <어댑테이션>은 <아이다호>와 <클루리스> 이후 만나는 가장 희한하고 담대하며 독창적인 ‘각색’영화이며 <디 아더스>의 탁월한 정통 각색과 동등한 반열에 있는 대척점이다. 찰리 카우프만의 ‘각색’은 매체의 전환이 아니라 원작에서 동기를 취해 텍스트를 확장하는 작업에 가까워 보인다.

당신이 뫼비우스 띠에 매료됐거나 스크린을 찢고 이면을 보고 싶어하는 관객이라면 <어댑테이션>은 왕후의 성찬이다. 그러나 꼭 게임에 임하는 자세의 관객이 아니라고 해도 <어댑테이션>은 충분히 즐겁다. 극중 찰리 카우프만은 <바톤 핑크>의 불쌍한 작가보다 훨씬 액션에 적극적이며 쉬운 유머를 구사한다. 니콜라스 케이지의 1인2역은 솜씨좋은 원맨 밴드의 레코딩 같은 만족감을 안기고 메릴 스트립은 유례없이 귀여운 마약중독의 징후를 보여준다. <존 말코비치 되기>와 <휴먼 네이처>를 장식했던 황당무계한 플래시백도 빠지지 않는다. 다만, 카우프만 쌍둥이의 스토리에 비해 존 라로쉬와 수잔 올리안의 드라마가 희미하다는 점은 아쉽다. 무엇보다 <어댑테이션>은 보편적 경험에 호소한다. 우리는 저마다 그럴듯한 인생 시나리오를 쓰려고 들지만, 제대로 된 갈등이나 클라이맥스는커녕 제대로 된 악당마저 나타나주지 않아 고전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고보면 ‘어댑테이션’이라는 단어는 유기체가 적대적인 환경에서 살아남으려는 적응 노력을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존 말코비치 되기>에서 육체와 정체성의 감옥에서 탈출을 기도했던 스파이크 존즈와 찰리 카우프만은 <어댑테이션>에서도 텍스트라는 네모 반듯한 울타리로부터 도망을 꾀한다. 장르 파괴 정도로는 간에 기별도 가지 않는 그들의 탈주욕구는 마침내 각본의 십계명까지 박살냈다. <어댑테이션>은 그처럼 남들이 가지 않은 신천지가 아니면 만족하지 못하는 위험한 마음의 고백이며, 영화 속 존 라로쉬가 찾아 헤매는 난초처럼 희귀한 ‘향정신성’ 영화다.

:: 라로쉬 역의 크리스 쿠퍼

앞니는 없다, 카리스마는 있다

“아아, 저 배우 이름이 크리스 쿠퍼야?” 캐릭터 속으로 녹아 사라지는 스타일의 연기자 크리스 쿠퍼(53)는 배우들은 다 알고 존경하는 고참이지만, 일반 관객은 바로 옆자리에서 맥주를 마셔도 알아보지 못하는 배우로 살아왔다. 그러나 지난 3월 <어댑테이션>의 존 라로쉬 역으로 거머쥔 오스카 남우조연상은 쿠퍼가 누려온 익명의 자유를 끝낼 듯하다(크리스 쿠퍼는 <캐치 미 이프 유 캔>의 크리스토퍼 워컨에게 자기의 한표를 던졌다고 밝혔다).

캔자스 출신인 쿠퍼는 내성적인 성격을 염려한 초등학교 선생님의 강권으로 학예회에서 노래를 부른 것을 계기로, 무대 생활을 시작했다. 뉴욕으로 이주해 연기를 공부하고 지방 극단에서 12년간 생계를 유지한 쿠퍼는 존 세일즈의 <메이트완>으로 1987년 영화계에 데뷔한 이래 스크린과 브라운관에서 쉼없이 활동했다. 관객과 평단에 깊은 인상을 남긴 연기로는 존 세일즈가 연출한 <론 스타>의 보안관 역과 <아메리칸 뷰티>의 케빈 스페이시에게 파국을 가져다주는 섬뜩한 이웃 역할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아메리칸 뷰티> 이후 쿠퍼는 쏟아져 들어오는 폭력적인 아버지 역할에 진력을 내기 시작했다. <어댑테이션>의 라로쉬 역은 그에게 과거의 캐릭터들을 한번에 찢어버릴 수 있는 탐나는 기회였다. 있는 듯 없는 듯한 불행한 사나이를 주로 연기해온 크리스 쿠퍼는, <어댑테이션>에서 난초이든 열대어이든 언제나 열광할 대상이 있는 부럽도록 충만한 인간 존 라로쉬로 변신했다. 라로쉬가 되기 위해 체중을 감량하고 앞니가 몽땅 날아간 가짜 치아로 분장해야 했던 쿠퍼가 겪은 또 다른 어려움은, 상대배우 메릴 스트립에 대한 평소의 감탄과 존경이 라로쉬의 얼굴에 드러나지 않도록 억제하는 것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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