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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있는, 내 얘기 같구나, <어바웃 어 보이>
2003-05-15

‘내 인생의 영화’라는 코너에 글을 부탁받으면서 과연 내 인생에서 영화가 무엇인가를 잠깐 생각해보았다. 영화제 일을 하면서 과거처럼 즐거운 대상으로 영화에 접근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이 있었다. 그런 와중에 <어바웃 어 보이>는 ‘영화의 재미’라는 것을 다시 일깨워준 작품이었다.

분명히 이 영화는 미학적인 성취가 뛰어나다고 말할 수 있는 작품은 아니다. 원작이 되는 소설은 대중소설에 지나지 않으며 외관상으로 보기에도 그냥 시시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언급하는 것은 이러한 시시한 외관 바깥에 있는 무언가가 나의 영화관에 어떤 영향을 끼쳤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에게 진정성을 부여하는 영화가 무엇인지에 관해 자신있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고다르나 베리만, 올리베이라를 답할지는 몰라도(히치콕이나 하워드 혹스는 그리 많지 않다!), 최소한 이러한 대화가 오가는 맥락에서, 그 영화들이 작동되는 방식이 현재 진행형이라고 보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어바웃 어 보이>가 제기하는 문제들은 동시대의 감각 안에서 완벽하게 ‘현재형’일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모든 영화가 현재형일 필요는 없지만, 그 안에서 관객의 위치를 묻고 그 자리를 심문하는 영화들이 나에게 더 소중하다는 것을 <어바웃 어 보이>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영화의 주인공 윌은 과거 전성기 영국의 역사를 재현하는 인물처럼 보인다. 아버지의 영광으로 유지되는 그의 현재의 삶은 신경병적인 외관으로 가시화된다. 그것은 소통에 대한 두려움이기도 하고 자신의 현재 모습을 직시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기도 하다. 반면 똘똘한 소년인 마커스는 윌을 연대의 열린 장으로 끌어내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고전 할리우드영화가 아니다. 마커스의 노력은 윌과 마커스의 엄마가 결혼하거나 혹은 윌이 과거 아버지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사회가 원하는 한 사람의 멋진 남성(?)으로 기능하게 되거나 하는 방식의 뻔한 결론을 맺지 않는다. 즉 이 영화의 세계는 케인스 경제학이 아닌 다른 경제학이 지배하는 세계이다(그것을 경제학이라는 분과에 넣을 수 있다면, 혹은 우리가 그 ‘경제학’을 정신분석학의 경제학에 놓는 유혹을 거부할 수 있다면). 이 영화의 결말부분에 제시된 것처럼 공동체가 민족이란 상상적 경계나 가족이라는 고정된 제도, 즉 초월적 동기가 아닌 다른 실질적인 동기와 목적으로 접합될 수 있는가? 가족이 혈연이라는 기존의 결합을 넘어, 서로 전혀 다른 환경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될 수 있을까? 이 영화는 그러한 비전을 미약하게나마 보여주고 있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인물들이 부부라는 제도가 아닌 다른 대안을 선택하며 어울려 사는 것을 확인했을 때 반가웠던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폐막작으로 선정된 <파 프롬 헤븐>을 보면서, 이 영화가 더글러스 서크의 멜로드라마의 외향을 띠고 있는 것이 정당하다고 느낀 것은 2003년에 만들어진 서크의 영화라는 다소 동떨어진 맥락이 아니라, 60년대 서크의 영화들이 가졌던 멜로드라마의 급진성이 2003년이란 동시대에 맞게 번역되었다는 사실에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그렇게’ 낯설지 않았다. 물론 이 영화가 제기하는 문제들(동성애와 인종문제)이 지금까지 진행형이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파 프롬 헤븐>은 구스 반 산트가 <싸이코>를 리메이크한 것과는 다른 길을 선택하며 영화의 힘을 과시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난 이해할 수 없는 영화에 매혹된 적은 없다. 내가 말하는 이해라는 것의 층위는 매우 다양하지만, 움직이는 이미지로서의 영화, 그리고 과거를 회상하게 만드는 영화들에 항상 매혹된다.

내가 <어바웃 어 보이>를 내 인생의 영화라고 말하는 건 변덕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 영화는 동시대 할리우드영화와 조금 다른 외관을 갖고 있긴 하지만 영화를 통한 사유를 조장하는, 그런 영화는 아니다. 그러나 <어바웃 어 보이>에서 보이는 인물들의 사고와 생활방식은 역시 한국에서 살아가는 대부분 우리의 삶을 앞서나가는 것 같고, 나의 인생은 그 영화들을 거부하지 않고 나의 삶의 기억의 조각으로 받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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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성/ 부산국제영화제 홍보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