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피플 > 씨네클래식
영화사 신문 제13호(1934~1936) [1]
심은하 2003-05-17

영화사신문 제13호

The Cine History

격주간·발행 씨네21·편집인 이유란

1934 ~ 1936

7살 셜리 템플, 깜찍 연기로 공황기 미국 영웅 부상, ‘영악한 속임수’ 비판도꼬마 소녀가 미국 구원하다?

7살 꼬마가 할리우드, 나아가 미국 전체를 쥐락펴락하고 있다. 이 꼬마는 20세기폭스사를 적자에서 구해냈고 절망에 빠진 수많은 미국인들을 위로하고 있다. 또한이 꼬마는 할리우드의 여느 스타보다 많은 연 30만달러의 수입을 올리고 매주 3500통의 팬레터를 받고 있으며, 그가 선정하는 상품은 해마다 30만달러 이상의 수입을 거두고 있다. MGM의 대표 루이스 메이어가 이 꼬마를 한번 빌리는 조건으로 MGM 소속 최고 스타인 클라크 게이블과 진 할로를 한꺼번에 빌려줄 계획을 세웠다는 사실이야말로 이 꼬마의 가치를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괴력의 스타파워를 지닌 이 꼬마가 바로 셜리 템플이다.

1935년 12월19일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이 셜리 템플에게 이례적인 찬사를 보냈다. “국민들이 어느 때보다 낙담에 빠진 이 대공황기에 미국인들이 극장에 가서 15센트를 주고 이 아이의 웃음을 보고 시름을 잊을 수 있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라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템플은 주로 고아나 사생아처럼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고통받는 위치에 처한 아이로 나온다. 하지만 템플은 이같은 환경에 굴하기는커녕,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어른들의 굳어버린 마음을 녹이고 나아가 그들을 감화시켜 다른 사람들을 돕도록 한다. 이러한 템플의 행동에 대해 대공황으로 고통받던 미국인들은 열광했다. 템플이 1934∼35년에 출연한 9편의 영화가 거둔 흥행성적은 폭스사도 놀랄 만큼 엄청난 것이었다. 그 덕에 템플은 1935년 2월 ”1934년 한해 동안 영화산업에 기여한 특별한 공로를 인정”받아 아카데미 특별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이 꼬마 스타를 바라보는 시선이 고운 것만은 아니다. ‘30살 먹은 난쟁이’, ‘영악한 속임수의 레퍼토피(레퍼토리????)를 지닌 인형’이라는 비판도 있다. 또한 한 평자는 “템플의 이미지는 상층계급의 재산은 건드리지 않고, 하층계급의 주머니에서 나온 자선기금으로 공황을 극복하려는 미국 정부의 경제정책에 영합하는 측면이 있다”면서, “그래서 그녀의 보조개를 무조건 좋아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에이젠슈테인은 반동 예술가”

소련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 공포, 몽타주이론 비난

소련 공산당 정부의 영화정책 노선이 급격히 바뀌고 있다. 1935년 1월에 열린 전소비에트 영화창작노동자회의는 이러한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준 자리가 됐다. 두달 전에 시사회가 열린 <차파예프>가 회의 내내 인용된 반면, 몽타주이론과 영화의 대가인 에이젠슈테인은 공개적으로 불신임받았다. 레프 쿨레쇼프 또한 “나는 탁월한 혁명적 예술가가 되기를 원했지만, 이는 혁명과 당의 대의와 일치할 때만 가능하다”라며 스스로를 깎아내렸다.

이날 회의는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를 영화의 공식정책으로 공포하는 자리였다. 문화부 관리 즈다노프가 밝힌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란 “인간의 삶을 죽어 있거나 현학적인 방식이 아니라 진실되게 그리기 위해서는 삶을 알아야” 하며, “단순히 객관적 현실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혁명적 발전 속에 있는 현실을 묘사하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몽타주와 같은 형식주의는 폐기처분되어야 할 예술인 것이다. 에에젠슈테인과 같은 형식주의자들이 비난받은 것도 이런 이유다. 반면, 민중의 이익에 개인의 욕망을 종속시키는 긍정적인 영웅의 이야기를 알기 쉽게 풀어낸 <차파예프>는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에 걸맞은 모델로 제시됐다.

오즈 야스지로 승승장구3년 연속 최의 영화 선정

1934년 일본.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가 3년 연속 <키네마순보>가 선정한 최고의 영화에 뽑혔다. 오즈 야스지로는 1932∼34년 동안 매해 <태어나기는 했지만> <우연히 떠오른 생각> <부초이야기>가 <키네마순보> 비평가들이 투표한 최고의 영화에 선정되면서 일본에서 가장 주목받는 감독으로 떠올랐다. 이가운데 <우연히 떠오른 생각>과 <부초이야기>는 각각 미국영화 <챔프>(감독 킹 비더, 1931)와 <번뇌>(감독 조지 피츠모리스, 1928)에서 힌트를 얻거나 대부분을 재탕한 작품들. 오즈는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쓸 때 미국적인 분위기에 젖어들기 위해 호텔에서 묵고 세면도구까지 미국의 수입품을 사용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결과물은 ‘가장 일본적인 영화’라는 평가를 받았다.

인터뷰 : 무성영화 <모던 타임즈>로 5년 만에 돌아온 찰리 채플린“유성영화가 할리우드의 매력 앗아갔다”

1936년 찰리 채플린이 돌아왔다! 신작 <모던 타임즈>와 함께. 전작 <시티 라이프> 이후 5년 만이다. 이번에 찰리는 컨베이어 벨트에 낀 신경쇠약 직전의 노동자가 되어, ‘모던 타임’의 인생 조건을 풍자한다. 찰리 채플린은 <모던 타임즈>의 시사회 직후 아내이자 <모던 타임즈>의 여주인공으로 출연했던 폴레트 고다르와 함께 호노룰루로 떠났다 5개월 만에 로스앤젤레스로 돌아왔다.

5년 만에 신작을 찍었다. 그동안 무엇을 했는지. 일할 의욕이 생기질 않았다. 이대로 은퇴해버리고 집이고 뭐고 다 팔아버리고 중국으로 훌쩍 떠날까도 했다. 할리우드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무성영화 시대는 지나가버렸고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유성영화와 싸울 기분도 나지 않았다. 토키가 세력을 떨치게 된 뒤로는 지난날의 할리우드가 가졌던 매력은 완전히 사라졌다. 말하자면 하룻밤에 영화는 냉혹하고 심각한 산업으로 변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모든 것을 견딜 수 없었다.

그런데 어쩌다(?) <모던 타임즈>를 찍겠다는 생각을 했는지. 정말 우연이었다. 폴레트와 함께 멕시코의 티파니 경마장으로 은배가 걸린 레이스를 보러갔다. 그때 주최쪽에서 폴레트에게 남부 사투리로 인사 한마디를 해달라고 부탁해왔다. 스피커에서 그녀의 연설을 듣고 깜짝 놀랐다. 브루클린 태생인 그녀가 켄터키 사교계 미녀의 흉내를 보기좋게 해내고 있던 거다. 그러자 갑자기 일에 대한 의욕이 솟았다. 폴레트의 말괄량이 같은 기질을 스크린에 담는다면 틀림없이 좋은 영화가 될 것 같았다. 그리고 나서 어느 기자가 해준 이야기가 생각났다. 내가 디트로이트에 갈 거라고 했더니 그는 그곳의 콘베이어 벨트 시스템에 대해 말해주면서, 건장한 젊은 농부들이 대공장을 동경해 도시에 나오지만 이 벨트 시스템에서 4, 5년만 일하면 모두 신경쇠약에 걸린다는 무서운 이야기였다.

이번에도 무성영화다. 팬터마임은 점점 시대에 뒤떨어져가고 있다. 그렇게 느끼면서도 계속하자니 마음이 무겁다. 하지만 만약 내가 유성영화를 만든다면 아무리 잘해봐야 팬터마임 예술보다 나을 수 없을 것이다. 예컨대 나의 부랑자가 소리를 낸다면 어떤 목소리를 내면 좋은가, 그저 간단히 한두 마디 지껄이게 할 것인가, 이리저리 검토해보았으나 해결책이 없었다. 입을 뗀 순간부터 나는 다른 코미디언과 다를 바 없게 된다. 그게 무성영화를 그만둘 수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