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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영화의 진흥정책은 전액지원제로!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의 영화진흥사업 지원부문을 살펴보면 무려 25개 분야에 걸쳐서 진행된다. 이쯤 되면 영화와 관련된 거의 모든 부문에 지원하고 있는 셈이다. 예전 영진위의 주먹구구식 진흥사업이 나름대로 합리적인 모양새를 갖추고 있고,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기울이며 영화진흥을 도모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속내를 비집고 들어가보면 답답한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여전히 나눠먹기 혹은 눈치보기식의 폼새를 걱정해야 하는 정책 아닌 정책의 무원칙이 이면에 숨어 있다. 일반적으로 정책이라 함은 장단기적인 전략이 필요하며, 단계적으로 실행해가면 그것에 따른 성과물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모든 분야를 다 헤집어볼 수는 없지만, 영진위의 예술영화 진흥정책이 왜 성공할 수 없는지는 꼭 말하고 싶다.

영진위의 국내진흥사업 중 ‘저예산 예술영화 제작지원’ 부문이 있다. 순제작비 12억원 이하로 작품성과 예술성을 지향하는 극장상영용 영화에 한해 50% 내에서 최고 4억원까지 지원을 받는 제도다. 지원편수는 5편 내외다. 우선 순제작비를 12억원 이하로 제한하는 문제부터 살펴보자. 나름대로의 기준이 필요하겠지만, 이는 시장의 논리를 잣대로 한 기준이라는 생각이 든다. 상업영화 시장에서 경쟁력이 있으면 굳이 영진위의 지원을 받을 필요가 없다. 예술영화는 왜 저예산이어야만 하는 것도 모순이지만 시장의 논리에 근거하면서 예술영화 운운하는 것은 더더욱 모순이다. 물론 예술영화도 시장에서 경쟁력을 가져야 하며, 재생산이 가능하려면 투자한 제작비를 기본적으로 회수할 수 있어야 한다.

요는 이런 원칙의 문제가 아니라 예술영화가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작품성과 예술성이 있는 영화를 만들 수 있어야 하고, 계속해서 좋은 작품들이 제작될 수 있는 원천적인 토대가 마련되어야 하는 문제다. 예산의 문제는 작품의 성격에 따라 판단할 수 있어야 하고, 예술영화는 돈이 안 되니까 무조건 저예산이어야 하는 발상은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상상력을 원초적으로 제한하는 것이다. 결국 품질이 떨어지는 예술영화가 양산되고, 예술영화가 재생산될 수 있는 시장은 형성되지 못하는 악순환이 거듭된다.

영진위에서 현금 3억원 물품지원 1억원을 받았다고 치자. 나머지 제작비는 어디에서 구할 수 있을까. 일반 투자자들은 영진위에서 지원받았다는 사실을 알면, 그 작품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는다. 왜? 저예산 예술영화니까. 영진위의 지원은 도움이 아니라 오히려 마이너스다. 결과적으로 그 영화는 만들 수 없거나 기형적인 방식으로 제작되어 이상한(?) 작품이 되어버린다. 결국 예술영화의 품새만 차린 영화는 관객에게 외면당하고, 투자자들은 역시나 시장의 논리를 운운하며 자신들의 편견에 안주하게 된다. 이것은 예술영화를 지원하는 제도가 아니라 예술영화를 망치는 제도다.

사업의 목적이 ‘작품성과 예술성을 지향하는 영화를 만드는 것’이라면, 영진위는 제도 자체를 처음부터 다시 검토해야 한다.영진위가 이런 현실의 문제를 모르고 있는 것이 전혀 아니다. 정책 입안자들 스스로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문제다. 그런데, 왜?

사실 예술영화가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는 것은 일반 상업영화처럼 한편의 기획에 승부를 거는 방식으로는 불가능하다. 한 사람의 감독을 만들어내야 하는 문제다. 그것은 곧 한편의 영화가 아니라 적어도 몇편의 영화를 통해 형성되는 기나긴 투쟁의 시간이 필요하다. 한국영화의 다양성을 위해서 예술영화도 필요하니까가 아니라 전략적인 지원과 현실가능한 방법으로 지원해야 한다. 그러면 어떤 감독의 어떤 작품을 밀어줄 것인가. 이놈 저놈 눈치보면서 모두 다 입맛을 맞추려면, 지금의 제도를 계속 유지하면 된다. 하지만 사업의 목적은 평생가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우선 도움도 안 되는 생색내기를 걷어치우고, 예술영화 전용펀드를 만들어서 과감하게 제작비 전액을 지원하라. 작품에 따라 예산의 규모를 평가하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전폭적으로 밀어주라. 그리고 결과를 엄격하게 평가하여 지속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그러면 반드시 초기 투자비용을 시장에서 회수할 수 있다. 마지막 과제는 펀드를 운용하고 심사하는 주체의 ‘권위’의 문제다. 이것 역시 눈치보기를 하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확신과 소신을 갖고 집행할 수 있는 ‘주체’의 틀을 만들고, 성과에 따라 계속해서 권위를 가질 수 있도록 밀어준다면 반드시 좋은 감독, 좋은 영화가 나온다. 예술영화가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리고 영진위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다. 이승재/ LJ필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