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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사랑도 변하더라니까, <봄날은 간다>
2003-06-25

사실 그날 밤 우리가 왜 다퉜는지 생각이 나질 않는다. 대개의 부부싸움이 그렇듯이 싸우다보면 우리가 무엇 때문에 말다툼을 시작했는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각자의 공간에서 마음속에 높은 담을 쌓은 채 누군가가 먼저 말 걸어주기를 애타게 바라고 있다. 화풀이 상대로 고른 텔레비전만 뚫어지게 보다가 혹시 그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촉각을 곤두세워봐도 아무런 기척이 없다. 말 한마디만 하면 나도 모른 척 넘어갈 텐데, 미안하다고 말할 텐데…. 1분 1초가 흐르는 것조차 셀 수 있을 정도로 천천히 가는 시간 앞에 헛기침 한번도 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가 잠들었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갑자기 밀려오는 무력감과 허탈감. ‘나는 속상해서 죽을 지경인데 잠이 오나?’ 정말 야속하다.

<봄날은 간다>를 토요일 밤. 하필이면 남편과 싸운 그날 밤 보게 되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가슴이 쌩하니 아리다. 특히 상우가 은수에게 했던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혼잣말 같은 이 말은 큰소리가 되어 한참을 머릿속에 뱅뱅 돈다.

결혼하기 전 어느 해인가 많은 눈이 내렸던 12월31일. 그는 한해의 마지막날에 내 얼굴 한번 보겠다며 연휴 근무를 선배와 바꾸고 목포에서 서울까지 길이 얼어 차가 빙빙 돌고 갓길로 처박히는 무시무시한 고속도로로 차를 끌고 온 적이 있었다. 서울에 도착해 그가 열심히 내게 삐삐(비퍼)를 치는 그 시간에 나는 입사 동기들과 종로거리를 헤매느라 그가 온 사실을 까마득하게 잊고 말았다. 그가 다시는 나를 만나지 않겠다며 그날 밤 목포로 돌아가버린 사실을 이튿날 알았고 일주일이 지나도록 그는 연락 한번 없었다. 그랬던 그가 이제 다 잡은 물고기(?)라고 이럴 수가 있나?

누구든 그랬겠지만 적어도 내 사랑은 남들과 다르다고 믿었다. 10년, 20년이 지나도 우리의 사랑은 처음 그대로 변하지 않을 거라고 검은 머리가 파뿌리되도록 백년해로하자고 마음먹었는데, 아니 그것도 모자라 죽어서 다시 태어나도 우리 또 결혼하자고 했었는데 다 철없을 때의 이야기인가? 그날 밤 내린 결론, ‘그래 우리의 사랑도 변했다!’ 그렇게 영화는 완전한 나의 이야기가 된다. 그래, 사랑이 변하면 끝장나는 거야.

난 상우의 열병 같은 첫사랑을 담담하게 군더더기 없이 그린 것이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도 대나무숲에서 들리는 소소하지만 부드러운 바람소리가 좋았다. 초등학교 다닐 적 해남 외갓집 담에는 하늘처럼 높은 대나무들이 둘러싸고 있었는데 댓잎을 꺾어 조리를 만들고 입으로 피리를 불어봤지만 풀풀거리는 소리만 날 뿐이었다. 또 외할아버지 제사 때마다 일가친척이 다 모여 하얀 쌀떡을 조청에 찍어 먹던 기억과 깨끗한 적삼저고리를 입고 은비녀를 꽂은 외할머니의 단아한 모습이 생각난다. 지금은 여든을 훌쩍 넘기신 외할머니가 세월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간혹 정신을 놓으신다는 엄마의 말을 건성으로 흘려들었었지.

내 봄날은 영화와는 조금 다를지도 모른다. 영화에서는 사랑이 지나가버린 기억 속의 봄날이지만 나는 끝나지 않았다. 그냥 시간이 흐르는 대로 흘러 내 감정도 내 일상도 봄을 지나 소나기가 내리는 여름날 어느 하루쯤에 와 있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누가 먼저 변했는지 알 수 없지만 가랑비에 옷 젖듯이 조금씩 변한 것 같다.

다음날 회사에서 방송을 준비할 때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은 그의 목소리. “영아야. 지금 나 출근하는데 비가 내리네. 우산 안 가지고 왔지? 회사 앞에 나 와 있어. 지금 바로 내려와.” 퉁명스럽던 내 목소리가 자꾸만 작아지고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온다. 하룻밤 뒤척이면서 생각했던 많은 것들이 연분홍 치마처럼 휙… 하니 날아가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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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아/ SBS 아나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