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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사 신문 제14호 (1937~1938)
이유란 2003-07-08

영화사신문 제14호

The Cine History

격주간·발행 씨네21·편집인 이유란

1937 ~ 1938

위대한 애니메이션 태어나다<백설공주와 일곱난장이> 흥행가도, 비평계에서도 높은 점수

월트 디즈니는 1937년 겨울 최초의 컬러애니메이션 <백설공주와 일곱난장이>를 개봉했다. 이 작품의 엄청난 성공은 디즈니에 해마다 장편 만화영화 한편씩을 공개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1938년 초, 영화 사상 최초의 장편애니메이션인 <백설공주와 일곱난장이>(<Snow White and Seven Dwarfs>)가 개봉 전의 모든 우려를 불식시키며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다. 또한 1937년 12월21일 첫 공개된 이래 비평에서도 높은 점수를 받고 있다.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은 <백설공주…>를 두고 “지금까지 만들어진 가장 위대한 영화 중 하나”라고 극찬했다.

사실 개봉 전 할리우드 안팎에는 <백설공주…>가 ‘재앙’이 될 거라고 경고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지금까지 애니메이션은 본프로 전에 ‘끼워’ 상영되는 5, 6분짜리 단편이 고작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관례를 깨고 장편을 만든다면, 그것도 <백설공주…>처럼 뻔한 이야기를 애니메이션화한다면 대체 누구 돈을 주고 보러올 것인가 하는 회의가 팽배했던 것이다. 더구나 <백설공주…>는 애초의 제작기간과 제작비를 크게 웃돌면서 우려를 부추겼다. 7개월로 예정된 제작기간이 30개월을 끌었으며, 그러는 동안 제작비는 25만달러에서 175만달러로 치솟았던 것이다.

하지만 월트 디즈니는 굴하지 않고 모든 역량을 <백설공주…>에 쏟아부었다. 스튜디오 직원들의 여자친구, 부인까지 동원돼 그림을 셀룰로이드에 옮기고 색을 칠할 정도였다. 그는 새로운 애니메이션 창조를 꿈꿨다. 그래서 풍성한 디테일 묘사를 위해 통상의 셀보다 큰 셀을 이용했고 화면의 전·중·후경을 서로 다른 속도로 촬영할 수 있는 ‘멀티플레인 카메라’라는 새 장비로 입체적인 화면을 만들어냈다. 또한 주연과 조연, 심각한 캐릭터와 웃긴 캐릭터를 골고루 배치하고 번번이 노래와 춤을 삽입했다.

뒤늦게 디즈니호에 승선, 배급을 맡은 RKO 또한 <백설공주…>의 흥행으로 큰 수익을 올릴 것으로 보인다. 원래 <백설공주…>의 배급사는 유나이티드아티스트(UA). 하지만 계약이 만료된 1937년 가을, 디즈니가 UA의 계약 연장조건인 ‘텔레비전 방영권 양도’를 거부하면서 계약은 종료된다. 이때 재정압박에 시달리는 디즈니 스튜디오에 유일하게 관심을 보낸 회사가 바로 RKO였다. 한편, 월트 디즈니는 앞으로 해마다 장편애니메이션 한편을 공개한다는 계획 아래, <피노키오> <밤비> <판타지아> 등 세편의 제작을 동시에 진행할 예정이다.

에이젠슈테인, 돌아오다

9년 만에 유성영화 <알렉산더 네프스키>로 컴백

12세기 게르만족의 침략에 대항해 러시아 민중을 이끈 슬라브 영웅 알렉산더 네프스키 왕자의 이야기를 다룬 에이젠슈테인 감독의 <엘렉산더 네프스키>

마침내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이 돌아왔다. 1938년 12월 에이젠슈테인은 그의 첫 유성영화 <알렉산더 네프스키>와 함께 스크린으로 돌아왔다. <낡은 것과 새 것> 이후 무려 9년 만이다. 물론 그 사이에 전혀 영화를 만들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1932년작인 <멕시코 만세>는 제작을 맡긴 소설가 업튼 싱클레어가 에이젠슈테인을 불신해 촬영 막바지 단계에서 제작을 중단시킨 뒤 자기 멋대로 영화를 편집했기 때문에, 사실상 에이젠슈테인의 영화라고 보기 어렵다. 또 1935년에는 유성영화 <베진 초원> 제작에 착수했지만, 스탈리의 신임을 받고 있던 국립영화사 소유즈키노의 대표 보리스 슈미야츠키가 딴죽을 거는 바람에 1937년 제작이 중단됐다.

슈미야츠키가 숙청되지 않았다면 <알렉산더 네프스키>도 미완으로 끝났을지 모른다. 슈미야츠키는 집요하게 에이젠슈테인을 물고늘어졌다. 그는 모스크바에 돌아온 에이젠슈테인이 착수하려는 프로젝트마다 트집을 잡았다. 그 트집이 얼마나 집요했냐 하면, <베진 초원>을 찍을 때 <프라브다>를 통해 별다른 근거도 없이 “에이젠슈테인이 과거의 오류를 인정했지만, 그와 무관하게 영화를 찍고 있다”고 비난한 적도 있다. 소문에 따르면 슈미야츠키는 괴짜 같은 성격과 불손한 유머감각을 지녔다는 이유로, 에이젠슈테인을 몹시 싫어했다고 한다.

에이젠슈테인은 슈미야츠키가 면직된 이후에야 <알렉산더 네프스키>의 제작을 허가받을 수 있었다. 대규모의 예산이 들어간 <알렉산더 네프스키>는 12세기를 배경으로 게르만족의 침략에 대항해 러시아 민중을 이끈 슬라브 영웅 알렉산더 네프스키 왕자를 주인공으로 영화. 에이젠슈테인은 프로덕션 세부는 물론 화장과 의상디자인까지 직접 맡으며, 혼신을 기울여 이 영화를 완성했다.

더러운 나치스트 다큐, <올림피아>히틀러 49번째 생일 축하 상영

레니 리펜슈탈의 <올림피아> 2부작이 1938년 4월20일 히틀러의 49번째 생일 축하 행사의 일환으로 상영됐다. 이는 나치의 선전상인 괴벨스의 아이디어였는데, 그는 <올림피아>를 보고 “형언할 수 없을 만큼 훌륭하다”라고 극찬했다. <올림피아>는 리펜슈탈이 <의지의 승리>에 이어 나치의 의뢰를 받아 만든 다큐멘터리로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 대해 담고 있다. 나치는 리펜슈탈에게 “국가 사회주의의 이념을 칭송하는 노래처럼 보이게 올림픽을 찍어달라”고 주문했다.

나치의 전폭적인 지원하에 리펜슈탈은 엄청난 물량을 쏟아부었다. 2주간의 올림픽 동안 40명의 카메라맨이 동원됐는데, 다이빙 장면을 연속적으로 찍기 위해 카메라맨들은 몇 개월 동안 수중촬영 훈련을 받기도 했다. 또 공중촬영을 위해 비행선을 띄웠다. 그렇게 해서 촬영한 필름이 400km였으며 이를 편집하는 데 2년이 걸렸다. 리펜슈탈은 이 필름을 2부작(총상영시간 225분)으로 완성했는데, 1부가 <민족의 향연>이고 2부가 <미의 향연>이다. 올림픽 경기를 통해 나타난 인간 육체의 아름다움과 힘에 집중하고 있는 이 다큐멘터리에는 아리아족 선수들의 수상을 강조하고 다른 경쟁자들의 인종적 열등함을 보여주려는 정치적 의도가 곳곳에 배어난다.

프랭크 카프라-해리 콘 다시 악수1년간 법적 소송 마무리, 새 프로젝트 협약

프랭크 카프라와 해리 콘이 드디어 화해했다. 오늘의 콜럼비아를 있게 한 주역인 이 사람은 1937년 가을 근 일년을 끌어온 법적 소송을 해결하고, 새 프로젝트인 <당신은 그걸 가질 수 없어>에 착수하기로 했다.

제작자와 감독으로, 10년 넘게 함께 일해온 두 사람이 법정까지 가게 된 사연은 이렇다. 카프라의 1934년작 코미디 <어느 날 밤에 생긴 일>의 대성공 이후 ‘카프라’라는 이름은 흥행의 보증수표가 됐다. 누구보다 이를 잘 아는 콜럼비아 사장 해리 콘은 B급영화인 <당신이 요리만 할 줄 안다면>를 영국에 배급하면서 제작사를 콜럼비아가 아니라 ‘프랭크 카프라 프로덕션’으로 명기했다. 흥행을 위한 꼼수였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격분한 카프라는 해리 콘에 대해 소송을 제기했다. 그리고 콜럼비아를 떠나기로 결심, 다른 영화사나 독립 제작자들과 협상을 벌여왔다.

하지만 해리 콘으로서는 카프라를 떠나보낼 수가 없었다. 카프라가 누군가? 신문이나 잡지에 리뷰도 실리지 않는 싸구려영화나 만들던 콜럼비아에, 자산 규모가 파라마운트나 MGM의 수십분의 일에 불과한 이 작은 영화사에 명예와 부를 동시에 안겨다준 감독 아닌가? 카프라를 붙잡기 위해 해리 콘은 카프라의 요구대로 20만달러를 주고 <당신은 그걸 가질 수 없어>의 저작권을 사들였다. 콜럼비아로서는 파격적인 액수다.

카프라는 1930년대 초 콜럼비아와 장기계약을 맺었다. “어떤 스튜디오도 줄 수 없는 재량권을 얻기 위해서”다. 그에 대한 대가로 해리 콘은, 카프라가 완전히 만족할 정도는 아니지만 카프라에게 상당한 권한을 일임했다. 그리고 카프라는 아카데미상 5개 부문을 석권한 <어느 날 밤…> <디즈씨 도시에 가다> 등 잇단 성공작을 내놓았다.

차기작인 <당신은 그걸 가질 수 없어>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현대판 코믹버전. 두 사람의 ‘애증’관계를 잘 아는 콜럼비아 내부 인사의 귀띔에 의하면, 시나리오를 쓰면서 카프라는 남녀주인공의 결합을 막는 양가 아버지에게 해리 콘의 성격을 절반씩 나눠놓았다고. 곧 한 사람은 저속하고 야비한 사업가인 반면 한 사람은 확고한 이상주의자란다. 이 사실을 해리 콘은 알까, 모를까?

<거대한 환상>으로 돌풍 일으킨 장 르누아르 감독“인류의 공통된 인간성을 표현하고 싶었다”

그의 1936년작 <인생은 우리들의 것>을 패러디해서 말한다면 ‘1937년은 장 르누아르의 것’이다. 르누아르는 <거대한 환상>의 개봉과 동시에 프랑스 평단과 극장가의 초점으로 떠올랐다. 나아가 이 영화는 정치·사회적으로도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예컨대 <거대한 환상>을 보고 루스벨트 대통령이 “민주주의자라면 누구나 보아야 할 영화”라고 강추한 반면, 나치 선전상 괴벨스는 “영화 제1의 적”이라고 비난했다. ‘거대한 성공’을 뒤로 하고 그의 두 번째 인민전선영화 <라 마르세예즈> 준비로 바쁜 그의 시간을 조금 빌렸다.

제목이 왜 ‘거대한 환상’인가. 제목도 정하지 않고 작업을 진행했다. 촬영과 편집이 끝난 다음에야 <거대한 환상>이라는 제목이 떠올랐다. 달리 마땅한 제목이 없었다.

전쟁영화이지만 전투가 등장하지 않는다. 예외적인 상황을 선택했다. 비행사들은 진흙탕 참호와 포탄에 으깨어진 음식과 거리가 멀다. 보병들의 고생을 다루고 싶지는 않았다. 인류의 공통된 인간성을 표현하는 것이 나의 목적이다.

독일 장교로 출연한 에리히 폰 슈트로하임과의 작업은 어땠나. 제작자가 슈트로하임을 캐스팅하자고 제의했다. 그가 수락했다는 소식을 듣고 정말 흥분했다. 원래 그 독일 장교 역은 5분이 안 되는 작은 역이었는데, 그가 캐스팅되면서 시나리오가 크게 바뀌었다. 촬영 초기엔 그와 다툼도 많았다. 하지만 내가 ‘당신과 다투느니 연출을 포기하고 말겠다’고 하자 울면서 노예처럼 나의 지시를 따르겠다고 약속했고, 그 약속을 지켰다.

<라 마르세예즈> 준비는 잘돼가나. <인생은 우리들의 것>을 만들면서 노동자 계층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과 접촉할 수 있었다. 노동자들의 권력 장악 속에서 우리의 파멸적인 이기심에 대한 해독제 같은 것을 보았다. <라 마르세예즈>는 비관례적인 모금 방식으로 제작비를 모으고 있는데, 미리 표를 구입한 사람은 무료로 영화를 볼 권리를 얻는다. 정직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나치에 저항할 책임이 있다. <인생은 우리들의 것>을 찍을 때도 느낀 건데, <라 마르세예즈>는 내게 인민전선의 의기양양한 기운을 숨쉬게 해준다.

(이 인터뷰는 르누아르의 자서전 <나의 인생 나의 영화 장 르누아르>를 토대로 한 것입니다.)

단 신 들

히치콕 할리우드 진출

영국 감독 히치콕이 할리우드로 간다. 1937년 8월 히치콕은 미국에서 제작자 데이비드 셀즈닉을 만나 타이태닉호 침몰에 관한 영화를 만들기로 하고 계약을 체결했다. 이 계약은 1939년 4월부터 발효된다. 얼마 전 <숙녀 사라지다>을 마무리한 히치콕은 미국으로 가기까지 남은 시간 동안 새 영화 <자마이카인>을 찍을 예정이다.

로마에 유럽 최대규모 스튜디오 오픈

1937년 3월28일 로마 근교에 유럽 최대의 스튜디오인 ‘치네치타’가 문을 열었다. 로마 근교 투스콜라나에서 1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치네치타는 60ha에 이르는 부지에 실험실, 강당, 9개의 사운드 스테이지, 제작진 숙박시설 등을 두루 갖추고 있다. 영화의 선전성에 주목한 무솔리니는 이탈리아영화를 활성화하기 위해 치네치타를 설립했다. 무솔리니가 1년 전 직접 건설현장에 와서 첫삽을 뜰 만큼 큰 관심을 보이는 것도 그런 때문. 이러한 그의 관심을 반영한 듯 스튜디오 문의 입구에는 “영화는 가장 강력한 무기”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국제영화자료실 설립

1938년 7월15일 파리에서 국제영화자료실(Federation International des Archives du Film, 이하 FIAF)가 설립됐다. 국제적인 연대와 교류를 통해 영화자료에 관한 보존과 연구를 도모한다는 것이 창설목적이다. FIAF 설립을 주도한 앙리 랑글루아는 “세계 영화유산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서는 국가별 라이브러리간에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는 것이 절실히 필요하다”라고 설립배경을 밝혔다.

스펙터클의 창시자, 멜리에스 별세

1938년 1월25일 영화적 스펙터클의 창시자, 조르주 멜리에스가 파리 ‘페르 라세즈’ 묘지에 묻혔다. 향년 78살. 이날 장례식에는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설립자인 앙리 랑글루아와 조르주 프랑쥐 등 많은 멜리에스의 추종자들이 참석해 고인의 마지막 길을 지켜봤다.

<안개 낀 부두>에 흔들린 우정

1938년 5월 프랑스, <안개 낀 부두>가 두 친구의 사이를 벌려놓았다. 장 르누아르가 이 영화에 대해 “파시스트 프로파간다”라며 반감을 표시했기 때문. 르누아르는 이 영화에 등장하는 부도덕한 인물들이 “행복하게 독재자의 손을 흔들어주는 파시스트”라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스스로를 반파시스트라고 믿는 시나리오 작가 자크 프레베르는 몹시 화를 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