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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사 신문 제13호 (1934~1936)
이유란 2003-07-08

영화사신문 제13호

The Cine History

격주간·발행 씨네21·편집인 이유란

1934 ~ 1936

꼬마 소녀가 미국 구원하다?

7살 셜리 템플, 깜찍 연기로 공황기 미국 영웅 부상, ‘영악한 속임수’ 비판도

<Our Little Girl>(1936). 영화 속에서 주로 템플은 고아나 사생아처럼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고통받는 위치에 처한 아이로나온다. 하지만 이같은 환경에 굴하지 않고, 무조건적인 사라응로 어른들의 굳어버린 마음을 녹이고 그들을 감화시킨다.

7살 꼬마가 할리우드, 나아가 미국 전체를 쥐락펴락하고 있다. 이 꼬마는 20세기폭스사를 적자에서 구해냈고 절망에 빠진 수많은 미국인들을 위로하고 있다. 또한이 꼬마는 할리우드의 여느 스타보다 많은 연 30만달러의 수입을 올리고 매주 3500통의 팬레터를 받고 있으며, 그가 선정하는 상품은 해마다 30만달러 이상의 수입을 거두고 있다. MGM의 대표 루이스 메이어가 이 꼬마를 한번 빌리는 조건으로 MGM 소속 최고 스타인 클라크 게이블과 진 할로를 한꺼번에 빌려줄 계획을 세웠다는 사실이야말로 이 꼬마의 가치를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괴력의 스타파워를 지닌 이 꼬마가 바로 셜리 템플이다.

1935년 12월19일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이 셜리 템플에게 이례적인 찬사를 보냈다. “국민들이 어느 때보다 낙담에 빠진 이 대공황기에 미국인들이 극장에 가서 15센트를 주고 이 아이의 웃음을 보고 시름을 잊을 수 있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라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템플은 주로 고아나 사생아처럼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고통받는 위치에 처한 아이로 나온다. 하지만 템플은 이같은 환경에 굴하기는커녕,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어른들의 굳어버린 마음을 녹이고 나아가 그들을 감화시켜 다른 사람들을 돕도록 한다. 이러한 템플의 행동에 대해 대공황으로 고통받던 미국인들은 열광했다. 템플이 1934∼35년에 출연한 9편의 영화가 거둔 흥행성적은 폭스사도 놀랄 만큼 엄청난 것이었다. 그 덕에 템플은 1935년 2월 ”1934년 한해 동안 영화산업에 기여한 특별한 공로를 인정”받아 아카데미 특별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이 꼬마 스타를 바라보는 시선이 고운 것만은 아니다. ‘30살 먹은 난쟁이’, ‘영악한 속임수의 레퍼토피(레퍼토리????)를 지닌 인형’이라는 비판도 있다. 또한 한 평자는 “템플의 이미지는 상층계급의 재산은 건드리지 않고, 하층계급의 주머니에서 나온 자선기금으로 공황을 극복하려는 미국 정부의 경제정책에 영합하는 측면이 있다”면서, “그래서 그녀의 보조개를 무조건 좋아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에이젠슈테인은 반동 예술가”소련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 공포, 몽타주이론 비난

소련 공산당 정부의 영화정책 노선이 급격히 바뀌고 있다. 1935년 1월에 열린 전소비에트 영화창작노동자회의는 이러한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준 자리가 됐다. 두달 전에 시사회가 열린 <차파예프>가 회의 내내 인용된 반면, 몽타주이론과 영화의 대가인 에이젠슈테인은 공개적으로 불신임받았다. 레프 쿨레쇼프 또한 “나는 탁월한 혁명적 예술가가 되기를 원했지만, 이는 혁명과 당의 대의와 일치할 때만 가능하다”라며 스스로를 깎아내렸다.

이날 회의는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를 영화의 공식정책으로 공포하는 자리였다. 문화부 관리 즈다노프가 밝힌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란 “인간의 삶을 죽어 있거나 현학적인 방식이 아니라 진실되게 그리기 위해서는 삶을 알아야” 하며, “단순히 객관적 현실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혁명적 발전 속에 있는 현실을 묘사하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몽타주와 같은 형식주의는 폐기처분되어야 할 예술인 것이다. 에에젠슈테인과 같은 형식주의자들이 비난받은 것도 이런 이유다. 반면, 민중의 이익에 개인의 욕망을 종속시키는 긍정적인 영웅의 이야기를 알기 쉽게 풀어낸 <차파예프>는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에 걸맞은 모델로 제시됐다.

천재 장 비고 요절하다

픽션영화로는 장 비고가 처음으로 만든 <풍행제로>는 제작이 끝난 뒤 1945년까지 상영 금지 처분을 받았던 작품이다.

아깝고 안타까운 죽음이다. 1934년 10월5일 프랑스의 청년감독 장 비고가 결핵성 폐결핵으로 요절했다. 그의 나이, 겨우 스물아홉살이다. 몇주 전 개봉한 그의 두 번째 장편극영화 <라탈랑트>가 그의 유작이 됐다. 비고는 <라탈랑트>와 함께 죽었다. 폐결핵을 앓던 그는 무슨 작심이나 한 듯 혹한의 겨울에 이 영화를 찍었고, 촬영을 하면서 “나는 <라탈랑트>로 나 자신을 죽이고 있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그는 병상에 누워 있느라 생명을 걸고 만든 이 영화의 최종 편집본을 보지 못했다. 편집자 루이 샤방스(Louis Chavance)가 혼자 <라탈랑트>를 편집했고, 배급사인 고몽-FFA가 시사회 관객의 반응을 고려해 상당수의 장면을 삭제한 뒤 최종 편집본을 완성했다.

그래도 관객과 조우할 수 있었던 <라탈랑트>의 운명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그의 극영화 데뷔작인 <품행 제로>(1933)는 아직까지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시골 기숙학교에 다니는 네명의 남학생들의 ‘반란’을 그린 이 영화는 “종교와 교육제도에 대한 신랄한 조롱으로 사회질서를 교란시킨다”는 이유로 정부로부터 상영금지 처분을 받았다. <품행 제로>는 문제아로 10대를 보낸 그의 경험이 녹아 있는 영화다. 그는 열두살 때 아버지를 잃었다. 과격한 무정부주의자인 아버지는 감옥에서 누군가에게 교살된 채 발견되었다. 이후 ‘반역자의 아들’이라는 낙인이 찍힌 그는 학교 기숙사에서 <품행 제로>에 실명 그대로 등장하는 문제아들과 어울리며 10대를 보낸다. 비고는 소르본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면서 영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 1928년 촬영감독 레옹스 앙리 뷔렐의 조수로 영화에 입문했다. 1929년 지가 베르토프의 동생인 보리스 카프만과 의기투합해 만든 다큐멘터리 <니스에 대하여>가 그의 첫 번째 영화다.

인터뷰: 무성영화 <모던 타임즈>로 5년 만에 돌아온 찰리 채플린“유성영화가 할리우드의 매력 앗아갔다”

1936년 찰리 채플린이 돌아왔다! 신작 <모던 타임즈>와 함께. 전작 <시티 라이프> 이후 5년 만이다. 이번에 찰리는 컨베이어 벨트에 낀 신경쇠약 직전의 노동자가 되어, ‘모던 타임’의 인생 조건을 풍자한다. 찰리 채플린은 <모던 타임즈>의 시사회 직후 아내이자 <모던 타임즈>의 여주인공으로 출연했던 폴레트 고다르와 함께 호노룰루로 떠났다 5개월 만에 로스앤젤레스로 돌아왔다.

5년 만에 신작을 찍었다. 그동안 무엇을 했는지. 일할 의욕이 생기질 않았다. 이대로 은퇴해버리고 집이고 뭐고 다 팔아버리고 중국으로 훌쩍 떠날까도 했다. 할리우드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무성영화 시대는 지나가버렸고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유성영화와 싸울 기분도 나지 않았다. 토키가 세력을 떨치게 된 뒤로는 지난날의 할리우드가 가졌던 매력은 완전히 사라졌다. 말하자면 하룻밤에 영화는 냉혹하고 심각한 산업으로 변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모든 것을 견딜 수 없었다.

그런데 어쩌다(?) <모던 타임즈>를 찍겠다는 생각을 했는지. 정말 우연이었다. 폴레트와 함께 멕시코의 티파니 경마장으로 은배가 걸린 레이스를 보러갔다. 그때 주최쪽에서 폴레트에게 남부 사투리로 인사 한마디를 해달라고 부탁해왔다. 스피커에서 그녀의 연설을 듣고 깜짝 놀랐다. 브루클린 태생인 그녀가 켄터키 사교계 미녀의 흉내를 보기좋게 해내고 있던 거다. 그러자 갑자기 일에 대한 의욕이 솟았다. 폴레트의 말괄량이 같은 기질을 스크린에 담는다면 틀림없이 좋은 영화가 될 것 같았다. 그리고 나서 어느 기자가 해준 이야기가 생각났다. 내가 디트로이트에 갈 거라고 했더니 그는 그곳의 콘베이어 벨트 시스템에 대해 말해주면서, 건장한 젊은 농부들이 대공장을 동경해 도시에 나오지만 이 벨트 시스템에서 4, 5년만 일하면 모두 신경쇠약에 걸린다는 무서운 이야기였다.

이번에도 무성영화다. 팬터마임은 점점 시대에 뒤떨어져가고 있다. 그렇게 느끼면서도 계속하자니 마음이 무겁다. 하지만 만약 내가 유성영화를 만든다면 아무리 잘해봐야 팬터마임 예술보다 나을 수 없을 것이다. 예컨대 나의 부랑자가 소리를 낸다면 어떤 목소리를 내면 좋은가, 그저 간단히 한두 마디 지껄이게 할 것인가, 이리저리 검토해보았으나 해결책이 없었다. 입을 뗀 순간부터 나는 다른 코미디언과 다를 바 없게 된다. 그게 무성영화를 그만둘 수 없는 이유다.

단 신 들

더들리 니콜스 최초로 아카데미상 거부

1936년 5월5일 미국. 제9회 아카데미에 이변이 벌어졌다. 각색상 수상자인 <밀고자>(The Informer)의 더들리 니콜스가 아카데미 사상 처음으로 수상을 거부한 것이다. 또한 니콜스는 같은 영화로 감독상을 수상한 존 포드와 함께 아카데미 시상식을 보이콧했다. 이들이 이러한 행동을 선택한 것은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 소속 제작자들과 노사 분규를 벌이고 있는 다양한 영화인협회들에 대한 연대감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1927년 설립된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는 MGM 대표 루이스 메이어 등 할리우드 제작자들이 주도한 단체로 아카데미상 선정 이외에 미국영화를 기술적, 교육적, 문화적으로 표준화한다는 것을 목표로 내걸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아카데미의 궁극적인 노림수는 할리우드 내 노동조합들이 더 높은 임금과 노동조건을 요구하며 압력을 가해오는 데 대한 집단대응이라는 인식이 높아지면서 노조 소속 영화인들의 비난도 거세졌다. 한편, <밀고자>는 1922년 아일랜드 혁명기를 배경으로 돈을 위해 아일랜드 공화군 동료를 배반하는 한 남자의 고통과 죽음을, 이제는 ‘고전’이 된 독일 표현주의영화풍으로 그린 영화로, 아카데미에서 감독상과 각색상 이외에 남우주연상과 최고음악상을 수상했다.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설립

1936년 9월2일 프랑스. 무성영화를 보존하기 위한 비영리단체인 ‘시네마테크 프랑세즈’가 설립됐다. 앙리 랑글루아, 조르주 프랑쥐, 장 미트리는 무성영화 프린트의 손실을 방지하고 영화라는 자산을 후대에게 자산으로 물려주기 위해 영화보관소가 필요함을 깨닫고 지난해부터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설립을 추진해왔다. 한편 미국에서는 1935년 뉴욕 현대미술관이 산하에 영화 라이브러리를 설립했으며, 영국 또한 같은 해 런던 필름 소사이어티를 열었다. 이 영화보관소들은 <대열차 강도> <국가의 탄생> 등 주로 할리우드와 유럽의 무성영화 고전들을 수집하고 있다.

<밑바닥 인생> 제1회 루이 델뤽상 수상

1936년 12월22일 프랑스. 제1회 루이 델뤽상 수상작에 장 르누아르 감독의 <밑바닥 인생>이 선정됐다. 이 상은 영화사상 처음으로 ‘시네아스트’ 라는 용어를 사용했던 영화이론가 루이 델뤽을 기리기 위해 모리스 베시 등의 젊은 평론가들이 제정했다.

일본 감독 오즈 야스지로 승승장구

1934년 일본.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가 3년 연속 <키네마순보>가 선정한 최고의 영화에 뽑혔다. 오즈 야스지로는 1932∼34년 동안 매해 <태어나기는 했지만> <우연히 떠오른 생각> <부초이야기>가 <키네마순보> 비평가들이 투표한 최고의 영화에 선정되면서 일본에서 가장 주목받는 감독으로 떠올랐다. 이가운데 <우연히 떠오른 생각>과 <부초이야기>는 각각 미국영화 <챔프>(감독 킹 비더, 1931)와 <번뇌>(감독 조지 피츠모리스, 1928)에서 힌트를 얻거나 대부분을 재탕한 작품들. 오즈는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쓸 때 미국적인 분위기에 젖어들기 위해 호텔에서 묵고 세면도구까지 미국의 수입품을 사용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결과물은 ‘가장 일본적인 영화’라는 평가를 받았다.

중국 최고 여배우 완령옥 자살

1935년 3월8일 중국 최고의 여배우 완령옥이 음독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나이 이제 스물다섯살이다. 그는 유서에서 “내가 죽어도 아쉬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단지 세상의 풍설이 사람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는 이 사회가 두렵다”라고 적었다. 그가 말하는 ‘세상의 풍설’은 옛날 애인 장달민이 언론에 폭로한 그와 장달민, 새 애인 당계산이 얽힌 연애 스캔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 장달민은 완령옥이 자신과의 결혼을 해소하지 않고 당계산과 동거했다고 주장했다. 스캔들로 절망에 빠진 그는 <신여성>의 감독 채초생과 결혼해 홍콩으로 떠날 생각이었으나 이 청혼마저 거절되자 자살한 것으로 추정된다. 상하이에서 생계를 위해 몸을 파는 여주인공이 자신의 직업 때문에 사회에서 낙인 찍힌 아들을 위해 투쟁한다는 내용의 <신녀>(神女, 1934)가 완령옥의 유작이다.

미국 동시상영 일반화

1935년 미국 대공황으로 인한 관객 감소를 막기 위한 방안으로 마련된 동시상영이 일반화되고 있다. 통계에 따르면 전국 극장의 85%가 장편영화 2편, 여기에 만화와 뉴스릴 등을 포함한 프로그램을 동시상영하고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이는 관객을 유인하기 위한 것으로 1930년 유성영화 도래 직후 9천만명에 이르던 주간 관객이 32년에는 6천만명으로 줄었으며, 1935년에는 미 전역의 극장 1만6천개 가운데 5천개가 문을 닫는 등, 대공황과 함께 관객이 크게 감소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