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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사 신문 제12호 (1932~1933)
이유란 2003-07-08

영화사신문 제12호

The Cine History

격주간·발행 씨네21·편집인 이유란

1932 ~ 1933

영화 학살자로부터 도피하라프리츠 랑 등 유대계 독일 영화인들, 나치 피해 엑소더스 시작

프리츠 랑이 파리로 떠난 다음날인 3월29일 괴벨스는 대변인을 통해 “<마부제 박사의 유언>은 국민에게 반사회적 행동과 국가에 대한 테러를 선동하는 영화”로 규정하고 상영금지를 천명했다.

1933년 나치의 집권 뒤 독일 영화인들의 엑소더스가 시작됐다. 영화팬인 히틀러와 그보다 더 영화에 광분한 선전국장 요셉 괴벨스가 영화를 프로파간다의 수단으로 길들이기 위해 영화에 대해 강력한 통제권을 행사하기 시작하자,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영화인들이 대거 해외로 빠져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취임 초기 괴벨스는 독일의 위기가 물질과 경제만이 아니라 문화에도 만연한 것으로 보면서 “독일영화를 그 뿌리부터 개혁할 용기가 필요하다”라고 주장했다.

탈출 행렬의 선두에 선 인물은 독일의 대표적인 감독인 프리츠 랑. 그는 나치 제국의 선전국장 괴벨스로부터 UFA 수장을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던 3월28일 밤, 독일을 떠났다. 이날 괴벨스는 랑에게 UFA 수장이 되어 그 첫 번째 영화로 <윌리엄 텔>을 제작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러한 제안이 놀라웠는데, 며칠 전 괴벨스는 랑의 신작 <마부제 박사의 유언>의 프리미어를 금지했기 때문이다. 이 자리에서 랑은 “외조부모가 유대인”임을 들어 고사했으나, 괴벨스는 “누가 유대인인지는 우리가 결정할 것”이라며 그의 허락을 재촉했다. 이에 랑은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하고는 그날 밤 파리로 떠났다.

유대인인 영화인들이 독일을 떠나기 시작했다. 괴벨스가 모든 유대인들을 영화산업에서 쫓아내도록 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영화기구, 심지어 외국회사가 차린 독일 지사에서 일하는 것까지 금지됐다. 이에 감독인 막스 오퓔스, 로베르토 시오드막, 시나리오 작가인 빌리 와일더, 칼 메이어, <M>의 명배우 피터 로레가 독일을 떠났다. 또한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 출연배우인 콘라드 바이트는 아리아족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으로 분류되는 바람에 독일을 벗어나야 했다.

폭력적인, 너무나 폭력적인

총격과 유혈사고가 난무하는 <스카페이스…>, 수정 후 2년만에 햇빛

1932년 5월19일 하워드 혹스의 갱스터영화 <스카페이스, 국가의 수치>가 ‘드디어’ 개봉한다. 영화가 완성된 지 2년 만이다. 그동안 <스카페이스> 제작진은 검열에 걸려든 일부 장면을 삭제하고 일부 장면은 추가하면서 영화의 내용을 순화시켜왔다. MPPDA는 제작자인 하워드 휴스에게 마피아 두목 알 카포네를 직접 연상시키는 영화제목(‘스카페이스’는 알 카포네의 별명이다)을 바꿀 것과 주인공인 토니 카몬테가 결국은 죄의 대가로 처벌되고 토니의 어머니가 그를 ‘나쁜 아들’취급하는 장면을 추가할 것 등을 요구했다. 이에 휴스는 원래의 영화제목에 ‘국가의 수치’를 덧붙였다.

그럼에도 <스카페이스>는 지금까지 만들어진 그 어떤 영화보다 폭력적인 영화로 기록될 것 같다. 이 영화에서는 ‘화면 위’에서 28명이 죽고, 19번의 차사고가 일어나며 영화사상 처음으로 기관총이 등장한다. <스카페이스>는 1931년 탈세 혐의로 구속된 마피아 두목 알 카포네와 갱들간에 벌어졌던 밸런타인데이 대학살 사건 등을 소재로 한 영화로, 시카고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갱들을 지켜봐온 벤 헤크가 아미타주 트레일의 소설 <스카페이스>를 토대로 시나리오를 썼다. 한편 시카고시를 비롯한 일부 주들은 이 영화의 개봉을 금지한다고 밝혔다.

버스터 키튼 ‘끝없는 추락’

별난 행동과 잦은 이탈에 MGM 계약 취소

1933년 2월2일, 찰리 채플린과 함께 ‘코미디의 왕’으로 군림했던 버스터 키튼이 MGM으로부터 해고됐다. 그의 별난 행동과 잦은 세트장 이탈로 제작을 지연시킨 것이 화근이 됐다. 이를 보다 못한 MGM 대표 루이스 메이어는 <뭐! 맥주가 없어?>의 촬영이 끝나자마자 그와의 계약을 취소했다. 버스터 키튼의 내리막은 1928년 <스팀보드 주니어 빌> 등의 흥행 실패 뒤 그의 독립영화사가 MGM에 흡수되면서 시작됐다. 버튼은 MGM에 들어간 뒤에도 자율적인 영화제작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했으나, 현실은 그의 기대를 철저히 외면했다. 그의 감독 필모그래피는 1928년에서 뚝 끊겨버린다. 스튜디오 시스템에 대한 부적응과 아내 나탈리 탈머그와의 이혼으로 실의에 빠진 그는 술에 절어살았고, 그러는 동안 유성영화가 보편화되면서 그의 재능은 한물간 것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그에게 남겨진 유일한 영역이 연기였으나, 이번 해고로 버튼은 그 기회마저 잃게 되었다.

불운의 스타, 패티 아버클 떠나다

1910, 1920년대 초반을 풍미했던 미국의 코미디언 패티 아버클(Fatty Aburckle)이 사망했다. 1933년 6월39일 아버클은 잠을 자던 도중 사망했다. 향년 42살. 이날은 그가 워너브러더스와 장편영화 출연계약을 맺던 날. 아버클은 몹시도 기다려온 재기의 날을 눈앞에 두고 그만, 영영 눈을 감아버렸다.

아버클은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코미디언이었다. 그는 버스터 키튼을 발탁하기도 했는데, 키튼은 1917년 아버클의 영화 <푸줏간 소년>의 조연으로 스크린에 데뷔했다. 하지만 1921년 9월 그의 화려한 시절은 갑작스럽게 끝난다. 신참 여배우 버지니아 라프에 대한 강간 및 살해 혐의로 고소된 것이다.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기 전 언론은 마구잡이식으로 아버클에게 혐의를 뒤집어씌웠다. 언론은 아버클을 당시 비난의 대상이었던 할리우드의 방종과 타락의 상징인 양 다뤘다. 1923년 아버클은 세번에 걸친 재판에서 증거불충분으로 살인혐의를 벗는다. 하지만 파라마운트는 여론에 밀려 그를 해고한다. 이후 그는 보드빌 등에 출연하며 근근이 생계를 연명해오다 워너브러더스가 제작한 코믹 단편에 출연하면서 새로운 기회를 얻는다. 이 단편들이 흥행에 성공하자 워너브러더스는 그에게 장편 계약을 제의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계약을 맺던 날 아버클은 세상을 떠났다.

주목! 이 사람/ 칼 프로인트(Karl Freund)

카메라를 공중에 날리는 촬영의 마술사

공포영화 <미이라>로 감독 신고식

과거에 ‘그’없이 독일 표현주의영화를 논할 수 없었던 것처럼 현재에는 그 없이 할리우드 공포영화를 말할 수 없다. 그는 독일 표현주의영화의 대표작인 <골렘> <메트로폴리스>, 역시 카머스피엘의 대표작인 <미카엘> <마지막 웃음>에서 수준 높은 볼거리를 창조했고, 공포영화 <드라큘라>의 화면에 괴기스런 분위기를 불어넣었다. 그가 바로 독일 출신의 촬영감독 칼 프로인트다. 1932년, 그가 마침내 공포영화 <미이라>로 감독 데뷔했다.

1890년 보헤미아에서 태어나 베를린에서 자란 그는 파테의 뉴스릴 카메라맨을 거쳐 1911년 독일 UFA의 카메라부 부장으로 임명됐다. 카메라맨으로 그는 새로운 형태의 렌즈와 필름, 조명 기술을 개발하며 끊임없는 실험정신을 보여줬다. <메트로폴리스>를 찍을 때는 확대 거울을 통해 미니어처를 배경에 비춰, 마치 이 배경에서 실제 행동이 이뤄지는 것처럼 보이도록 하는 속임수 기법인 ‘슈프탄 프로세서’를 개발했다. <마지막 웃음> 첫 장면에서 카메라를 자전거에 싣는 ‘원시적인’ 수법을 이용해 엘리베이터에서, 호텔 로비, 문 밖으로 이어지는 화면을 한 호흡으로 잡아낸 일화는 유명하다. 그는 <마지막 웃음>에서 카메라의 고삐를 완전히 풀어놓았다. 카메라는 공중을 날아다니고 주인공과 함께 빙글빙글 돈다. 이러한 촬영기법은 이후 다른 영화들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언제나 새로운 촬영기법에 목말라하던 칼 프로인트는 컬러필름 제작과정을 익히기 위해 독일을 떠났고 런던, 뉴욕을 거쳐 할리우드로 갔다. 그는 유니버설과 계약을 맺고 1931년 토드 브라우닝의 <드라큘라>를 촬영했고, <미이라>로 감독 데뷔했다. <미이라>는 1920년대 초 투탕카멘의 묘 발굴 이후 풍문으로 떠돈 미라의 저주를 소재로 한 공포영화. 8시간이 걸린 보리스 카를로프의 미라 분장과 연기가 돋보이며, 흥행에도 성공해 ‘감독 데뷔’라는 프로인트의 새 실험이 도박이 아님을 증명했다.

영국 영화 ‘신 르네상스’

스크린쿼터제로 체력 회복, <헨리 8세…> 등 대작 제작도

<헨리 8세의 사생활>은 전세계적으로 50만파운드를 벌어들여 대성공을 거뒀다.

1933년, <헨리 8세의 사생활>이 대대적인 흥행 성공을 거두며 영국영화의 부흥을 가시적으로 드러냈다. 헨리 8세의 개인사를 그린 이 영화는 전세계적으로 50만파운드를 벌어들였으며, 특히 미국에서는 일찍이 어떤 영국영화도 누리지 못한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이에 미국쪽 배급사인 유나이티드 아티스트는 제작자인 알렉산더 코다와 16편의 추가 배급계약을 맺었다.

현재 영국 영화산업은 스크린쿼터제 덕에 새로운 부흥기를 맞이하고 있다. 영국 정부는 1927년 극심한 침체에 시달리던 영국영화를 회복시키기 위해 쿼터제를 도입, 상영업자로 하여금 전체 상영일수의 5%는 영국영화로 채우도록 했다. 여기에는 영국 영화산업을 보호해야 한다는 위기감과 함께, 할리우드영화를 통한 미국의 상품과 문화 침입에 대한 경계심이 함께 작용했다. 이어 영국 정부는 이 비율을 점차 늘려왔다. 쿼터제 실시 이후 영국영화 제작 편수는 쿼터를 상회할 만큼 크게 늘었다. 물론 쿼터 채우기용 날림 영화가 양산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확장된 산업 기반 위에서 <헨리 8세의 사생활> 같은 대작의 제작도 가능해졌다.

한편 영국 정부는 “영화예술의 발전을 격려하기 위해” 1933년 9월1일, 영국영화연구소(The British Film Institute, 이하 BFI)를 설립했다. 영화 문화를 보호하고 널리 보급한다는 취지다. BFI의 설립은 영국의 성인교육기구가 지난해 제출한 보고서에서 이러한 기구의 필요성을 제기하면서 성사됐다. BFI는 정부의 재원으로 운용되며, 영화월간지를 발행할 예정이다.

단 신 들

“영화가 아이들을 만든다”

1933년, 영화가 청소년들에게 적잖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연구결과가 발표돼 충격을 주고 있다. 페인기금연구회가 발표한 보고서 <영화가 아이들을 만들었다>에 따르면, 아이들은 세계의 해석이나 일상의 행동거지, 특히 성적 행동에 있어서의 도덕적 기준을 마련하는 데 영화로부터 큰 영향을 받고 있다. 이같은 연구 결과는 앞으로 할리우드 영화제작에 적잖은 압력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페인기금연구회는 심리학자, 사회학자, 교육전문가로 구성된 사설 연구단체로 1929∼32년까지 미국 전역에 걸쳐 영화가 청소년에게 끼치는 영향을 조사해왔다.

괴벨스-에이젠슈테인 설전

독일 나치제국 선전국장 요셉 괴벨스와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 사이에 설전이 벌어졌다. 괴벨스가 <전함 포템킨>을 극찬한 데 대해 에이젠슈테인은 야유로 응수한 것이다. 1933년 3월28일 나치 제국 선전국장 요셉 괴벨스가 연설에서 <전함 포템킨>을 ‘감동적인 영화’로 꼽으면서 “확고한 정치적 신념이 없는 사람조차 이 영화를 보고 볼셰비키가 될 수 있으며 이것은 예술작업이 선전적일 수 있다는 점을 명백히 보여준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에이젠슈테인은 ‘괴벨스에게 보내는 공개장’에서 “거짓된 허섭쓰레기 속에 진실이 있을 수 없듯 사실주의 예술은 진보적 혁명사상과 사회주의적 구조에 의해서만 탄생한다”라고 밝혔다.

자니 와이즈뮬러, 6번째 타잔

1932년 3월 올림픽 수영선수 자니 와이즈뮬러가 영화사 통산 6번째 타잔으로 출연한다. 1924년과 1928년 올림픽 수영부문에서 5개의 금메달을 딴 와이즈뮬러는 1929년 수영에 관한 단편영화들에 출연해왔다. 이를 본 MGM이 그에게 새 영화 <타잔, 원숭이 인간> 출연을 제안하면서 전업배우로 나서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