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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적인, 현실이고 싶은 여성 이야기,<싱글즈> 작가 노혜영
2003-07-16

동화(童話)를 걷어버린, 20대 후반의 연애는 여전히 달콤할 수 있을까. 섹스프리(sex-free) 혼전 동거, 남자와 여자 사이의 우정, OL들의 유리천장, 임신과 결혼 혹은 싱글맘 등의 테제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는 <싱글즈>는, 시트콤 <연인들>을 거쳐 <브리짓 존스의 일기> 같은 (진짜 내 얘기 같아서) ‘울고 싶은’ 영화를 만들고자 한 노혜영 작가의 손끝에서 빚어진 ‘드라마’다(노 작가는 이게 로맨틱코미디는 아니라고 말한다).

94년 일본 <후지TV>에서 공전의 히트를 친 드라마를, 다시 소설로 꾸민 가 원작이라지만, 여주인공 나난(소설에서는 노리코)이 극 초반에 겪는 일련의 사건(전직, 실연, 원형탈모증)과 이성 친구들끼리 한집에서 산다는 설정 외에는 크게 원작과의 연계를 찾기 힘들다. <싱글즈>의 작가 노혜영은 “드라마는 자막이 없어 포기했고, 소설은 굳이 찾아 읽기 싫었다”는 말로 애초부터 원작 자체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음을 토로한다. 따라서 ‘불알 친구기 때문에’ 동미가 정준에게 떡하니 얹혀지내면서도 별다른 이성적 감정을 못 느끼는 거나, 맨송맨송해 보이는 나난이 역시 어리숙하게 느껴지는 수헌에게 흥미를 느끼는 설정 역시 원작과는 상관없이 노혜영 식으로 다시 쓰여진 부분이다. 소설에서 노리코가 사랑에 빠지는 키사는 대단한 집안의 자식이지만(때문에 집안의 차이로 연애가 어려움에 봉착하지만), 영화 속 수헌은 “한달에 천만원 벌어다주면 집에서 놀 거예요?”라고 물으면서도 정작 문도 안 열리는 고물차를 타고 다니며 능글하고 유치한 ‘작업’이나 벌이는, 그저 그런 평범한 사내로 등장한다.

노혜영은 “진짜 같지 않으면 자신도 안 볼 것”이라는 이유로 나난과 동미에게는 평소 자신과 친구들이 즐기던 수다를 하사했고, 남성 캐릭터들에게는 기백과 늠름함 대신, 소심함과 어눌함을 살짝 얹어주었다(여성친화적인 캐릭터가 너무 지나쳐 현실감이 없다는 비판도 있지만). 나난은 천상 자기 모습 그대로 만들어놓았고, 동미 캐릭터는 평소 자신이 하고 싶었던, 그러나 하지 못했던 말과 행동, 그리고 의식까지 힘을 실어 부풀렸다. 현실적이지만, 역시 판타지를 벗어나지 못하는 건 나난과 동미에게 부린 약간의 욕심 때문이었을까. 스스로 납득이 되지 않은 장면에서는 몇번을 고쳐쓰고, 혼자 대사를 치고받는 쇼를 하면서까지 그녀가 얻고 싶었던 건 현실에 가장 근접한 리얼리티이자, 그러나 맥빠지는 현실에 힘을 실어주고 싶은 판타지 둘 다였다.

싱글맘을 택하는 장면에서 동미가 나난에게 뺨을 얻어맞는 장면과 동미와 나난이 치열한 설전을 벌이는 장면이 실제 러닝타임에선 생략됐다. 이제 그만 됐다 할 때까지, 눈에 눈물이 흘러내릴 때까지, 스스로 고개가 끄덕여질 때까지 새로 썼다는 그 부분이 없어지자, 서운하기도 했지만, 결국 관객을 설득시키는 건 영화가 아니라 관객 자신이라는 생각에 서운함을 없앴다. 현재는 일본만화 <미녀는 괴로워>를 각색 중이다. 글 심지현·사진 이혜정

노혜영 | 1976년생·시트콤 <연인들> 보조 작가 · 영화 <영어완전정복> <싱글즈> 작가 · 현재 <미녀는 괴로워> 각색작업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