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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괴롭힐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개같은 내 인생>
2003-07-16

맨 먼저 떠오른 것은 <개같은 내 인생>이었다. ‘인생’이라는 단어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찬찬히 다시 생각해봐도 내가 본 영화 중에 대사든 장면이든 가장 많이 떠올랐던 것 역시 <개같은 내 인생>이다. 동네 비디오 가게 주인이 검색을 해보더니, “없어요. <개같은 날의 오후>는 있는데요…. 제목이 참 특이하네요”.

어렵게 다시 본 <개같은 내 인생>은- 80년대 말에 극장에서 봤던 걸로 기억하는데- 예전의 느낌이나 기억과는 약간 달랐다. 워낙 시차가 있지만 혹시 비디오는 몇 군데 편집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성장영화가 대개 그렇듯이 성적 호기심과 성에 대해 아이들이 갖는 오해나 갈등들이 더러 나오는, 중학생 이상 관람가 영화였고 주인공 잉마의 주위에는 호감을 갖고 잉마를 유혹하는 몇몇 여자아이들이 나온다. 그 때문에 잉마는 불필요한 의심을 받기도 하고 놀림을 당하기도 한다.

비디오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지금도 내게 가장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 있는 대사는 “예전에 운동장 한가운데를 지나가다가 창에 맞은 아이가 있었지, 얼마나 놀랐을까…”라는 다소 황당한 대사였다. <메멘토> 정도는 아니더라도 어지간히 부실한 내 기억력에 자신은 없지만 아무튼 비슷한 내용이었다.

어린 잉마에게 세상은 전혀 뜻대로 풀리지 않는 곳이다. 근거없는 오해를 사기도 하고, 주변의 도움이 화로 변하기도 하고, 좋아하는 개와도 함께 있지 못하고, 엄마와 많은 시간을 함께하면서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자신으로 인해 엄마는 더욱 괴로워하고…. 하지만 잉마는 이런 상황에서도 다소 황당한 비유와 상상, 그리고 특유의 장난기를 통해 입가에 미소를 머금는다. 잉마의 시선은 또 별이 가득한 밤하늘로 옮겨간다. “얼마 전에 타잔 흉내를 내다가 죽은 아이를 생각했다… 왜 타잔흉내를 내면 안 되는 걸까?” 엄마와 떨어져 삼촌집으로 가면서 “인간은 개를 우주로 보낼 수 있다. 개가 원치 않아도…”.

가만히 보면 아이들은 도무지 심각한 게 없다. 심각해졌다가도, 그것을 녹여내는 신비한 능력이 있는지 금방 풀어져 재잘대고 낄낄거린다. 어른들이 아이들을 보면서 배워야 할 많은 것 중 하나다.

묘한 것은, 이런 황당한 몇몇 대사들이 15년 가까운 세월 동안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간간이 떠오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억은 내게 주문처럼 여유와 미소를 주곤 한다.

얼마 전에 좋아하는 선배가 만화책을 냈다. 직접 그린 것은 아니고, 글을 쓰고 기획을 했다. 그림은 안세희씨의 도움을 받았다. 제목은 <지금까지 나를 괴롭힌 사람은 없다>였다. 정말 그렇다. 일상이 적나라하게 그려진 이 재미있는 만화를 보면서 곰곰이 생각해보면 누구나 수긍할 수 있겠지만 일상 속에서 이 화두가 체득된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어려운 상황이나 쉽게 풀 수 없는 문제들은 항상 우리 가까이에서 우리를 위협하고 놀려대지만, 나는 그 도전들에 어떤 자세로 대처하고 있는가를 생각해본다.

‘일체유심조’라고 했다. 모든 것이 오직 마음의 짓는 바라는 뜻이다. 내가 지어놓은 것이야 어쩔 수 없이 받는다지만, 그 받는 마음가짐이 넉넉하고 편안한지, 원망이나 불평으로 가득한지는 자신이 선택할 문제이다. 그리고 그 선택은 스스로에게 천국과 지옥의 갈림길이기도 하다. 잉마처럼, 밤하늘의 별을 보며 되뇌어본다. ‘지금까지 나를 괴롭힌 사람은 없다.’ 그리고 ‘앞으로도 여전히 나를 괴롭힐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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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민/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애니메이션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