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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바람은 인생의 박카스?<앞집 여자>

<앞집 여자> MBC 수·목 밤 9시55분

확실히, ‘바람난 여자’는 최근 한국 대중문화계에서 가장 각광받는 존재인가보다. 자유롭고 독립적인 성생활로 한국 영화사에 인상적인 족적을 남긴 여성들의 계보를 훑은 <씨네21> 특집 기사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또 한명의 ‘바람난 여자’가 안방 시청자들의 뒤통수를 후려치고 말았다.

드라마 <앞집 여자>의 주인공은 결혼 7년차 전업주부인 미연(유호정)이지만, 드라마에서 가장 돋보이는 인물은 미연의 ‘앞집 여자’인 애경(변정수)이다. 올해 나이 35살.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가 있는데도 단박에 시선을 끌 만큼 늘씬한 몸매에 완벽한 스타일을 자랑하는 애경은 얄미울 정도로 부족한 게 없다. 잘 꾸며놓은 집은 소문을 듣고 찾아온 방송사, 잡지사 사람들로 문턱이 닳을 지경이고, 소문난 요리 솜씨는 이웃 남편들의 반찬투정을 부채질한다. 얼마 전에는 샌드위치 전문점을 개업했는데, 특유의 음식 솜씨에 힘입어 웬만한 월급쟁이는 명함도 못 내밀 만큼 떼돈을 벌고 있단다.

그런데 애경이 살림 잘하고, 돈 잘 벌고, 아이 잘 키우고, 애교 만점인 슈퍼우먼으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은 바로 그가 만나는 남자들, 꼭 스무번씩만 만나 아낌없이 주고받은 뒤 쿨하게 헤어지는 남자들과의 위태롭고 달콤한 섹스에서 나온다. 애경은 현모양처의 탈을 쓴 요부인 셈이지만 ‘누구도 상처받지 않는 관계를 유지하기 때문’에 죄의식은 느끼지 않는다. 음전한 주부인 미연이 살랑거리는 바람의 유혹에 빠지는 듯하자 애경은 ‘선배’로서 가장 현실적인 충고를 해준다.

“난 딱 20%만 줘. 20%가 적은 것 같아? 내가 가진 돈이 1억이면, 2천만원이야. 그걸로도 충분해. 상처받고 어쩌고 하면 나만 손해잖아? 자기 설마, 남편하고 이혼하고 애까지 뺏기고 싶은 건 아니겠지? 그럼 사랑타령 그만두고 제대로 즐기기나 해. 못하겠으면 첨부터 그만두던지.”

애경은 국내 드라마 사상 가장 쿨하게 바람을 피우는 여성 캐릭터다. 대부분의 드라마에서 불륜은 화목한 가정을 파탄내고 배우자와 아이들에게 극심한 배신감을 안겨주는 용서할 수 없는 범죄였고, 주인공 여성은 주로 피해자의 입장에서 시청자들의 연민과 동정을 흠뻑 받았다. 그러나 애경은 지리멸렬한 피해/가해 논쟁을 가볍게 뛰어넘더니, 드라마 <애인>에서 보여준 낭만적인 불륜 신드롬이 실은 ‘눈 가리고 아웅’이었다는 사실마저 여지없이 까발린다.

“친구? 남녀간에 친구란 성적 긴장감이 없는 상태에서만 가능한 거야. 사랑? 누구든지 삼년만 같이 살면 시들해지지. 남자 거기서 거기야. 미련 떨 거 없어.”

불륜의 본질이 결국 섹스라는 사실을 이토록 직설적으로 보여준 드라마 캐릭터는 일찍이 없었다. 시청률은 단 2회 방송에 20%대로 치솟았고, 게시판은 지금 논쟁 중이다. 현실적이라는 칭찬과 비현실적이라는 비난이 엇갈린다. 자신이 발딛고 있는 현실을 파악하는 시각이야 저마다 다를 수 있으나, 분명한 건 어쨌든 애경이 행복해 보인다는 것이다. 그는 철저히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왔으며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손에 넣었고 무엇보다 자기 일상의 주인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옆집에 살고 있는 ‘보통 주부’ 미연은? 결혼 7년 동안 아파트 융자금 갚고 남편 뒷바라지하고 아이 키우면서 동동거리느라 마땅한 외출복 한벌 없고, 가슴 처지고 똥배 나오고 팔뚝 굵어지는 것도 잊고 살았는데 어느덧 중년이다. 남편에게도 종종 무시당하는 그가 대접을 받는 경우는 물건을 살 때뿐. 종업원은 비싼 원피스를 사라고 그를 꼬실 때는 상냥하기 그지없으나 반품하고 돌아서면 뒤통수에 대고 입을 비죽거린다. 백화점 고객으로서만 대접받는 미연이 8년 만에 다시 만난 첫사랑으로부터 뜨거운 관심과 상냥한 친절을 받는 기분이란!

자신의 행복보다는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일에 더 관심이 많은 미연이 중세인이라면 남들이 뭐라든 자신의 행복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애경은 근대 신여성이다. 이처럼 세대차가 나는 두 사람이 이웃해 살아가면서 엮어낼 미래가 궁금하기 짝이 없다. 결혼의 권태, 인생무상의 기로에서 달콤한 유혹을 느끼는 미연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인생의 목표였던 ‘행복한 가정’이 실은 부서지기 쉬운 환상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고 ‘헛살았다’며 가슴을 치지는 않을까? 다행스러운 것은 미연의 옆집에 한 세대를 앞서 살아가는 개화된 신여성이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애경는 머지않아 사회적 합의를 깨고 자신의 행복에만 집착한 죄로 돌팔매를 맞게 될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여성들이 그러했듯, 애경은 그 존재만으로도 미연, 혹은 평범한 우리의 삶에 묵직한 화두를 던진다. 나는, 진정 행복한가? 이미경/ <스카이라이프> 기자 friendl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