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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엇으로 사는가? <A .I.>
2003-07-24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어딘지 낯익은 이 화두는 인문학자로서의 내 자신에게 결코 끊이지 않는 자아성찰의 의문 중 하나이다. 요즘처럼 첨단 기계문명이 인간의 하루하루를 좌우하는 시대에도 이 화두는 여전히 그 무게감을 떨구지 않는다. 과연 과학과 인간은 우리 세계의 서로 다른, 대립적인 축인가?

1년 전 주말이었다. 여느 때처럼 비디오 앞에 둘러앉은 나와 우리 가족에게 스탠리 큐브릭의 원작을 토대로 만든 영화 <A.I.>는 뜻밖이었다. 만화적 상상력으로 인해 대중에게 외면당했다지만 영화를 야곰야곰 뜯어보는 습관이 있는 내게는 실로 가슴 철렁한 무거운 화두를 던져주었다. 나만 그러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아이들과 주말 저녁을 보내려고 가볍게 시작했던 기대는 어긋났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우리 가족은 점점 무겁게 무겁게 고요 속으로 가라앉고 말았던 것이다.

영화는 인간과 기계문명의 관계를 피노키오의 플롯을 따라 동화적 상상력으로 풀어 나간다. 얼핏 낡아 보이는 그 주제는 인공지능으로 대변되는 로봇이 인간처럼 감성적으로도 발달할 수 있는가를 다룬 것처럼 보인다. 실험적으로 만들어진 첨단 A.I, 아이 형상의 메카(로봇) 데이빗은 뇌사상태에 빠진 아이의 집에 들어가 그 엄마의 슬픔을 달래주다가 원래 아들이 기적적으로 소생하자, 엄마를 둘러싼 아이와의 갈등 끝에 버려진다. 그 과정에서 로봇 데이빗은 조금씩 질투의 감정을 갖고 엄마를 그리워하다가 엄마가 자신에게 읽어주었던 <피노키오>를 떠올리고, 블루 페어리를 만나 자신을 진짜 아이로 만들어 달래기로 한다.

그가 블루 페어리를 찾아다니는 과정은 다양한 외피로 감싸였지만, 어찌 보면 <천로역정>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또 구도의 길을 찾는 <화엄경>의 선재동자 같기도 하다. 본인은 인식하지 못하지만, 데이빗은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강철로봇처럼 점차 마음을 갖게 된다. 메카가 제한된 구역이자, 로봇을 만든 과학팀이 있는 곳에 도착한 데이빗은 자신과 똑같이 생긴 다른 데이빗을 보고 “넌 누구냐?”고 묻는다. 내게는 이 모습이 마치 자아와 정면으로 만난 인간의 모습으로 보였다. 정면으로 자신과 맞부딪친 데이빗은 어쩌면 여전히 청소년기의 의문을 짊어지고 사는 인문학자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큐브릭은 진정한 네 자신을 찾아 알에서 깨어나오라고 무수하게 외치는 또 다른 헤세였고, 데이빗은 데미안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안도의 숨을 돌릴 새도 없이 엄청난 충격을 받은 데이빗은 오직 자기만이 독창적(unique)이고 유일한 데이빗이라고 하며 다른 로봇들을 부숴버린다. 그리고는 엄마도 오로지 자기만의 엄마라고 주장한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정해진 프로그램대로 움직이던 인공지능 로봇이 결국 자기- 자의식- 를 내세우게 되었다. 이는 ‘엄마’라는 인간의 사랑에 반응하고, 그 사랑을 찾아- 아니, 자기의 사랑에 대한 보답을 얻고자 헤매다가 마침내 ‘독점’이라는 지극히 배타적인 감정의 영역에 도달해버리고 만 것이다. 원래 스탠리 큐브릭이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사랑의 본질과 관련된 것이었을지 모른다. 인간의 사랑에서 가장 기본적인 엄마의 사랑이 곧 자아와 연결된 셈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누군가가 내게 쉴새없이 물어오는 것 같았다. 너는 누구냐, 인간은 무엇이냐, 기계와 다른 점이 무엇이더냐. 어쩌면 한동안 잊고 있었을지 모르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질문이 집요하게 나를 물고늘어졌다. 인문학이란 결국 인간에 대한 학문이다. ‘말’(末)에 경도되어 ‘본’(本)을 잠시 잊어가고 있던 내게 영화는 ‘본’이 어디에 있었던가를 다시 되새기게 해주었다. 영화는 사실 인문학을 하는 내게, 그리고 사춘기 초입에 있던 우리 아들에게 구체적으로는 시사하는 바가 각기 달랐을지 모른다. 그러나 ‘사추기’(思秋期)라는 우리 역시 여전히, ‘나는 누구인가’,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끊임없이 묻고 대답하는 존재 아닌가. 아들이나 나나 정신적으로 같은 열병을 앓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는 무언 중에 우리에게 동질감을 느끼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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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정/ 서울대학교 박물관 객원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