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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니저로 사는 길
2003-08-12

“제가 양치기 소년이지만, 이번만은 다릅니다. 꼭 한번 믿어보세요. 정말 죽이는 연기자입니다. 아직 제대로 못 보여줘서 그런데요. 한번 써보면 압니다. 얘를 5년 동안 데리고 있어서 누구보다 잘 아는데….” 영화사 한켠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흔한 풍경이다. 한편의 영화에 캐스팅이 이루어지는 과정은 다양하다. 이미 스타로 자리를 굳힌 캐스팅의 경우와 아닌 경우가 일반적으로 구분되지만, 매니저가 감독이나 제작자를 만나서 지난한 싸움을 해야 하는 과정은 필수다. 한번의 만남에서 캐스팅이 결정되는 일은 거의 없다. 최소한 몇 개월의 수십번 반복되는 탐색전을 거친 뒤에야 결판이 난다. 충무로에서 통용되는 캐스팅의 또 다른 언어는 속칭 ‘자빠뜨린다’로 표현한다. 배우나 감독이든 제작자나 투자자든 누구의 입장에서건 상대방을 설득해서 승복시켜야 한다는 의미다.

매니저가 초짜 신인을 스타 연기자로 일구어내는 과정은 길고 긴 터널을 지나야 하는 인생역경의 드라마다. 매니저들이 흔히 술자리에서 푸념을 늘어놓을 때, “내가 말이야 라면 한끼도 못 먹으면서…”로 시작되는 인생 넋두리가 있다. 1년에 신발을 몇 켤레 갈아치웠는지의 숫자에 따라 성공여부가 판가름난다는 속설도 매니저들 세계의 한 단면이다. 속칭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녀야 한다는 말이다. 현재는 스타 배우를 거느리고 있는 최고의 매니저이지만 한때 매일같이 배우를 데리고 영화사로 출근했다는 일화는 충무로의 전설이다. 이처럼 한명의 배우가 만들어지기까지의 뒤안길에는 항상 훌륭한 매니저가 동행하고 있었다.

보편적으로 인생의 만남이 그러하듯, 동고동락을 함께해온 매니저와 배우가 평생의 약속을 지켜내는 경우는 거의 없다. 우리 끝까지 함께 가보자고 시작했지만, 스타가 된 그 배우는 어느 날 훌쩍 떠나버린다. 돈이 이유든 어떤 유혹이 이유든 스타가 되면 떠나보낼 수밖에 없는 시련을 또다시 겪어야만 한다. 한동안 고통의 눈물을 삼키고, 정신을 차린 이후에야 자신을 한번 돌아본다. 내가 이 짓을 계속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결국은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예정된 그 길을 다시 시작한다. 오랫동안 함께 가는 매니저와 배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개는 이런 수순을 밟는다. 자신을 한없이 어리석다고 탓해보지만, 어느 지점에 다다르서 초월하게 된다.

얼마 전 최근 가장 잘 나간다고 하는 모 매니저의 생일파티가 있었다. 말이 생일파티지 생일을 핑계한 가까운 지인들의 조촐한 술자리였다. 술판이 어느 정도 무르익자 속에 있는 말들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날의 주인공인 매니저가 벌떡 일어섰다. “여기 매니저인 사람만 다 일어나보세요. 우리끼리만 건배 한번 합시다.” 그가 건배 제의를 하면서 큰소리로 선창을 했다. “배우들은 모두 다 xx다.” 모두들 박수를 치면서 환호성을 질렀다. 비록 술판의 객기에 불과한 것이지만, 그의 눈가에는 이미 눈물이 젖어 있었다. 흐릿한 조명에 비친 그의 눈물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그 자리에 함께한 매니저들의 회한은 하나같이 술잔에 녹아들고 있었다.

철따라 스포츠지 1면을 장식하는 단골 기사 메뉴가 있다. 연예계 대부 모씨와 톱스타 모양이 어쩌고 어쨌다는 스캔들 기사다. 실제로 큰 스캔들인 경우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은 한 토막 단신 기삿거리도 안 되는 한편의 추리소설에 불과하다. 연예계 대부라고 일컫는 그들은 사실 연예계와 별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다. 일반 사람들은 대개 그들을 매니저와 결부시켜 생각할 수밖에 없는데, 대부라 일컬어지는 그런 매니저는 단언하건대 없다. 만약 그런 매니저가 있다면, 그는 영화계의 일원이 아니라 연예계를 기웃거리는 불량 변방인에 불과하다.

많은 매니저들이 자신의 직업을 떳떳하게 내세우지 못하는 데에는 이런 사회적 편견의 눈총 때문이다. 내가 아는 매니저는 새로운 배우가 탄생하기까지의 뒤안길에서 치열하게 동고동락하는 진정한 영화인들이다. 이른바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그들의 땀과 노력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하며, 여느 스탭과 마찬가지로 촬영현장을 24시간 지킨다. 물론 때로는 스타를 앞세워 자신의 이권을 챙기는 양아치라 치부되는 매니저도 있긴 하지만, 소수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매니저들은 배우 한번 키워보겠다고 불철주야 뛰어다니는 사람들이며,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많은 연기자들이 한국영화의 큰 밑거름이 되는 것이다. 매니저는 단순히 배우를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 역시 진정한 영화인이다. 이승재/ LJ필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