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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리포트1] 페미니즘 비디오 액티비즘:미학과 정치적 노선
박혜명 2003-08-19

곪아터진 가부장제 상처에 ‘카메라-메스’를!

바바라 해머, 마사 로즐러 그리고 30년의 페미니즘 액티비스트 7인을 만난다

여성을 말하는 다른 방식을 경험할 수 있는 영화제가 찾아온다. ‘페미니즘 비디오 액티비즘: 미학과 정치적 노선’이라는 제목으로 오는 8월21일부터 26일까지 7일간 대안영상문화발전소 아이공의 주최로 열리게 될 이 영화제는, 페미니즘 계열의 비디오 아티스트들의 작품들만을 모아 상영하는 자리다. ‘바버라 해머, 마사 로즐러 그리고 30년의 페미니즘 액티비스트’라는 부제에서 짐작할 수 있듯, 페미니즘 액티비스트 1세대에 해당하는 바버라 해머와 마사 로즐러의 작품부터 2세대인 시실리아 컨딧과 바날린 그린을 거쳐 슈리아 칭, 잔 핀레이, 수잔 오프터링거에 이르는 3세대의 작품들까지, 30년을 아우르는 페미니즘 비디오 액티비즘의 다양한 형식과 경향을 관객에게 소개할 예정이다.

이중 바버라 해머와 수잔 오프터링거의 작품은 국내에도 소개된 바 있다. 특히 바버라 해머는 지난 2001년 제3회 서울여성영화제의 게스트로 직접 한국을 찾기도 했다. 그러나 나머지 작가들이 정식 소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 행사의 본심이 여기에 있다. 국내 대중에게 아직은 낯설게 느껴지는 페미니즘 액티비스트들의 작품을 관객과 공유함으로써 좀더 적극적이고 과감하게 여성 자신을 말할 수 있는 움직임이 국내에서도 활발해지기를 기대한다는 것. 조금 거창한 구호처럼 들릴지라도 이것이 김연호 프로그래머가 밝힌 기획 의도이다. 그 일환으로 관객의 직접 참여를 유도하는 온라인 이벤트가 지난 6월25일부터 진행 중이다. 영화제 마지막 날인 8월26일까지 계속되는 이 이벤트는 ‘여성성 찾기: 미디어의 왜곡’이라는 주제로, 구체적인 동영상이나 이미지 자료를 가지고 미디어가 여성의 이미지를 다루는 방식에 대해 네티즌들의 직접 비평과 의견 교환을 기대하는 자리다. 25일 저녁에는 “문화 페미니즘 혹은 페미니즘적 문화 운동: 여성→페미니즘→문화→비디오→액티비즘→여성의 도돌이표”, “마사 로즐러: 정치적 아방가르드 비디오”, “바버라 해머: 레즈비언 액티비즘 비디오”라는 세 가지 주제로 세미나가 열릴 예정이다.

비디오라는 접근 수월한 매체를 가지고 여성 일반과 여성으로서의 자신에 대한 섬세한 관찰의 결과를 때로는 일기처럼 때로는 퍼포먼스처럼 표현해온 페미니즘 아티스트들. 그들 가운데 이번 영화제가 선택한 일곱 작가의 작품 48편 중 일부를 미리 들춰본다.글 박혜명 na_mee@hani.co.kr

<바비의 일생>

Tender Fiction/ 바버라 해머/ 1995년/ 58분/ 컬러/ 35mm

<질산염 키스>의 후속편으로 제작된 장편. 국내에서는 제1회 서울여성영화제에서 소개된 바 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 작품은 감독 바버라 해머의 자전적 영화이며, 무엇보다도 한 여성이 자신의 성정체성을 깨닫고 그것을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과정을 유쾌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는 셜리 템플이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에 우크라이나 이민 가정의 2세로 태어나 LA에서 자랐다. 모든 여성들 사이에서 셜리 템플이 하나의 브랜드처럼 떠받들어지던 시절 11살의 바버라 해머는 할로윈 날 남장을 했고, 서른살이 되던 해에 산티로사의 여성해방그룹에 들어가 ‘레즈비언’이란 단어를 처음 듣고, 그 말이 듣기 좋았다고 회상한다.

이 작품에서 해머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와 함께 엮이는 것은, 다양한 페미니스트와 해체주의자들의 저서를 인용한 문구다. 변조된 음성을 통해 해머는 버지니아 울프, 헬렌 시수, 롤랑 바르트, 조라 닐 허스톤, 수잔 프리드먼 등의 말을 들려준다. 이로써 사랑스러운 한 개인의 이야기는 그 개인을 포함한 공동체의 이야기로 남기에 이른다.

<질산염 키스>

Nitrate Kisses/ 바버라 해머/ 1992년/ 67분/ 흑백/ 35mm

바버라 해머의 첫 장편작. 93년 여성감독영화제 최우수 다큐멘터리상과 베를린 국제영화제 북극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 영화는 1900년대 초반의 소설가이자 레즈비언인 윌라 케이서부터 현대 게이운동에 이르기까지, 1차대전 이후 서구 문화의 주변부를 맴돌아온 게이 문화의 역사를 끄집어내고 있다. 이성애와 동성애의 경계를 허무는 것은 물론 나이와 인종까지도 불문하면서 노년의 레즈비언 커플과 흑인-백인 남성의 게이 커플의 섹스장면을 솔직하고도 부끄럼없는 태도로 보여준다. 보는 이에 따라서는 다소 불편할 수도 있겠지만 화면을 덮는 레즈비언과 게이들의 증언을 듣게 되면 이러한 시각적 정보들이 무리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자신들을 역사의 바깥으로 내동댕이쳤던 이 세계 속에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주장하기 위해 치러왔던 대가들과 그렇게 해서 이루어진 그들만의 역사이다. 그 태도는 때로는 위트있고 때로는 진지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작품에서 인상적인 장면은 레즈비언 커플의 섹스장면과 함께 교차편집으로 보여진 노년의 레즈비언들의 흥겨운 블루스다. 이 장면은 오프닝 시퀀스에서 흐르던 윌라 케이서의 말과 함께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나는 내 삶의 방식이 아닌 내 작품으로 기억되고 싶었다.”

<욕망의 들뜬 대상들>

Those Fluttering Objects of Desire/ 슈리아 칭/ 1992년/ 19분/ 컬러/ 베타

레즈비언 커플의 다양한 이미지들을 내레이션과 함께 연결해 보여주는 작품. 여성의 신체 일부를 클로즈업해서 추상적으로 혹은 사실적으로 담거나, 흑인-백인, 백인-백인 레즈비언 커플간의 섹스를 담은 사진들이 죽 이어져서 화면 위로 올라간다. 섬세하고 감각적인, 때론 격렬하고 즐거운 사랑이 흐르는 동안 이것은 내가 모르는 누군가의 먼 이야기가 아닌, 가까운 친구쯤을 추억하는 순간으로 변한다.

<손가락과 키스>

Fingers and Kisses/ 슈리아 칭/ 1995년/ 4분/ 컬러/ 베타

일본의 젊은 레즈비언 커플을 취재한 작품. 신나고 밝은 기타 음악이 시작되면, 길에서 혹은 실내에서 거침없이 섹스를 즐기는 레즈비언들의 모습이 감각적인 영상에 담긴다. 이는 한편의 뮤직비디오 같은 느낌을 준다. 4분짜리의 아주 짧은 단편이지만 앙증맞은 권말부록도 들어 있다. 이 영상의 주인공들이 직접 경험한 섹스에 대해 수줍어하면서도 솔직하게 말하는 인터뷰 클립이 그것이다. 관람은 19세 이상이지만, 작품이 주는 분위기는 여고생들의 발랄함과 비슷하다.

<역사 수업>

History Lessons/ 바버라 해머/ 2000년/ 65분/ 흑백/ 35mm

<질산염 키스> <바비의 일생>과 함께 바버라 해머의 게이 역사에 관한 다큐멘터리 삼부작의 마지막 시리즈. 2001년 제3회 서울여성영화제에 초청됐던 작품이다. 세편 가운데 가장 실험성이 짙은 이 작품은, 오래된 여성 포르노, 의학영화, 교육영화, 전쟁영화 등의 필름 자료와 뉴스 클립, 사진, 영화 포스터, 소설 표지 등 각종 시각적 자료들을 다양하게 조합해 레즈비언의 역사로서 재치있게 재구성하고 있다. 재치있다는 말은, 조합 과정에 교묘한 조작을 첨가했다는 의미다. 여성클럽에서 엘리노어 루스벨트가 했던 연설이 다른 클립과 함께 교차편집되면서 마치 여성들로 하여금 공동체적 단결 뿐 아니라 성욕까지도 하나로 뭉치는 데 힘써보자는 주장으로 뒤바뀌고, 2차대전에 참전한 여성들을 격려하는 아나운서 멘트는 레즈비언 포르노 영화 해설로 바뀌면서 <역사수업>의 농담은 진지함의 궤도를 즐겁게 벗어난다.

바버라 해머는 이 작품을 통해 61살의 나이에도 여전히 급진적이고 실험적인 페미니즘 액티비스트로서의 면모를 잃지 않고 있음을 스스로 증명한다. 동시에, 단단히 굳어 있는 역사를 장난스레 뒤틀면서 무리하게 폼잡지 않는 균형감각까지 보여주고 있다.

<퀸카 되기>

So, You Want to be Popular?/ 잔 C. 핀레이/ 1988년/ 18분20초/ 컬러/ 베타

제목 그대로 여성에게 이른바 ‘퀸카’가 되어 만인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법을 가르치는 ‘교육용’ 영화. 정치인, 연예인들의 ‘퀸카 되기 조언’을 담은 각종 비디오 클립이 이어지는 가운데 화면 위로는 상세하고 친절한 자막이 흐른다. 육체적 건강과 외모, 똑똑함, 용기, 순응력과 의존심 등 친구들로부터 인기를 얻기 위해 갖춰야 할 점들은, 당연히, 이 사회가 사회구성원을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들로 이미 오래전부터 작용해왔던 것들이다.

<지배와 일상>

Domination and the Everyday/ 마사 로즐러/ 1978년/ 32분7초/ 컬러/ 베타

까만 화면과 함께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대담으로 시작하는 이 작품은 미디어를 통해 지배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려는 권력을 비판한다. 예술 작품 딜러와의 인터뷰가 배경음악처럼 흐르는 동안 어린 아들과 엄마는 저녁을 먹고 잘 준비에 들어가고, 화면 위로는 이 모자의 모습 대신 칠레의 정치적 인물을 찍은 사진을 비롯해 가족 사진, 상업 광고, 실업률 도표 등이 나타나면서 하얀 자막이 흘러간다. 이 자막을 통해 마사 로즐러는 사회 권력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모든 문화와 개인의 삶까지도 지배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미디어를 통해 일상으로 파고들지만, 결국 어느 순간 오물처럼 내버려질 수도 있다. 저희들끼리 쉼없이 대화를 나누던 모자가 자리를 떠나 버린 뒤에도 지속되는 바보스러운 대담처럼.

<단순히 정해진 여성의 몸매 치수>

Vital Statistics of a Citizen, Simply Obtained/ 마사 로즐러/ 1977년/ 39분20초/ 컬러/ 베타

마사 로즐러의 페미니즘 비디오 작품 가운데 가장 유명한 작품. 한 여성의 신체치수 측정 과정을 오래도록 보여주면서 사회적인 통제하에 여성이 대상화되는 과정을 노골적으로 비유한다. 하얀 실내 안에서 남자의사로부터 신체치수를 꼼꼼히 측정당하는 여성은 사람들에게 자신에 관해 어떤 사실도 알려줄 수가 없다. 허벅지 둘레 사이즈나 가슴 크기 등 오로지 의사의 입을 통해 전달되는 단순한 수치들만이 그녀에 관한 모든 것이다. 이 측정 작업 이후에 로즐러는, 여성의 신체부위를 부분적으로 찍은 사진 클립을 이어 보여주면서 사회가 여성들에게 저질러온 ‘범죄’들을 또박또박 일러준다. ‘femicide’, 다시 말해 ‘여성죽이기’라는 범주로 묶일 그 범죄 항목들은 마사 로즐러의 정치적 성향을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단순고문사례>

A Simple Case For Torture, or How to Sleep at Night/ 마사 로즐러/ 1983년/ 61분46초/ 컬러/ 베타

<지배와 일상>과 마찬가지로, 마사 로즐러가 여성성과 페미니즘을 다루던 초기 성향을 벗어나 직접적인 사회비판적 입장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 이 작품에서 그는 미국 정부의 전체주의적 이데올로기와 이를 암묵적으로 지지하는 미국 언론을 비판한다. 워터게이트 사건을 비롯해 미국의 각종 정치·사회·경제적 이슈를 다룬 신문 기사들이 내레이션과 함께 화면을 차곡차곡 덮어가면서 미국 정부의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낸 모순을 드러낸다. 말하자면 그것은, 저소득 계층의 맞벌이 여성 지원정책을 축소한다는 내용의 기사와 돈으로 환산된 여성들의 잠재력을 강조하면서 직장을 가질 것을 권하는 공익광고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다. 마지막에 인용된 한나 아렌트의 저서 <전체주의의 기원>의 글귀는 이러한 현실 뒤에 숨겨진 의미를 날카롭게 짚어주고 있다.

<그녀들만의 것>

It’s a She-Thing/ 수잔 오프터링거/ 2000년/ 56분/ 컬러/ 베타

올해 서울여성영화제에 소개되었던 작품으로, 급진적 성향의 여성 예술가와 뮤지션들의 인터뷰와 그들의 작품이나 공연 클립을 편집한 다큐멘터리다. 피피토티 리스트, 올랑, 트레이시 에민, 사라 루카스 등 대중적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여성성이라는 주제에 꾸준히 집중해왔던 예술가들의 직접적인 어법이 작품과 말을 통해 드러난다. 프랑스 예술가 올랑의 인터뷰는 특히 인상적이다. “난 어려서부터 예쁘다, 귀엽다는 말을 자주 들었는데 내 속에 있는 생각들은 그렇지 않았다. 거울 속에서 내가 느끼는 것들과 관계없게 생긴 내 외모를 보았고, 나를 나타내지 못하는 외모는 내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9번에 걸친 성형수술을 받았다. 그것은 단지 외모를 바꾸는 성형수술이 아니라 그녀의 생각과 몸을 일치시키기 위한 퍼포먼스였던 셈이다.

<염증들의 대결>

Saddle Sores/ 바날린 그린/ 1999년/ 20분/ 컬러/ 베타

잘생긴 카우보이와 섹스한 뒤 포진 혹은 헤르페스라고 불리는 성병에 걸린 여성 비디오 아티스트의 이야기. 물론 바날린 그린 자신의 내레이션으로 진행된다. 할리우드 웨스턴영화와 무성영화 그리고 인터뷰를 짜깁기한 스타일이 형식적으로 돋보이지는 않지만, 말하자면 ‘나의 와일드 웨스트 모험기’라고 부를 수 있는 이 픽션 다큐의 유머러스함은 충분히 즐겁다.

<미시간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

Possibly in Michigan/ 시실리아 컨딧/ 1983년/ 12분/ 컬러/ 베타

조용한 일상을 침입당한 두 여인이 이에 대처하는 과정을 그린 단편. 남성들을 동물적인 야만성을 가진 존재로 설정하고 있다. 고무로 만든 동물 머리를 뒤집어쓰고 죄다 똑같은 복장을 한 남자들이 편안히 잠든 여자의 집 주변을 둘러싼다. 화면상 보여지는 이미지는 우스꽝스러운 유머에 가깝지만 의외의 결말과 맞닥뜨리는 순간 기괴한 느낌을 동시에 자아낸다.

<젊음에 대한 질투>

Not a Jealous Bone/ 시실리아 컨딧/ 1987년/ 11분/ 컬러/ 베타

여성이 가진 젊은 육체에 대한 욕구를 우화적으로 표현한 단편. 도입부에서 창조신화를 유머러스하게 차용함으로써 시작하는 이 작품은, 젊음을 지켜줄 수 있는 ‘마술뼈’를 해변가에서 주운 늙은 여인에게 벌어지는 일들을 재치있게 담고 있다. 여성성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보다는 작가의 유머감각이 돋보이는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