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내 인생의 영화
추운 보관소에서 떨고 있는 까닭은, <나이아가라>
2003-08-23

내가 제일 싫어하는 영화에 대한 질문은 당신이 좋아하는 영화는 무엇이냐 또는 어떤 영화감독을 좋아하는 가이다. 심한 건망증에 당시 왜 그 영화에 열광했는가를 잊어버리는 경우가 허다하기도 하지만 나이가 먹어감에 따라 좋아하는 것들이 달라지는데 어떻게 잣대를 딱 그어, 이 영화요 이 감독이요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지만 내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영화는 금방 대답할 수 있다. 이 영화 3편은 영화잡지에 베스트 10을 장식한 영화도 아니고 영화 관객의 심금을 울린 명작도 아니다. 아니 그중 한편은 사실 영화가 아니라 외국 신부가 비디오 카메라로 찍은 다큐멘터리였고 다른 한편은 1분도 넘지 않는 대사가 하나도 없는 무성영화이다.

18살, 그 좋은 나이에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무구 그 자체의 내가 우연히 학생회관에서 본, 제목도 안 떠오르는 <광주항쟁 다큐멘터리>는 내 인생에 영향을 끼친 첫 번째 영화였다. 세상이 너무나 순조롭게 흘러가는지 알았는데 알고보니 내가 알던 것이 다 가짜였다. 아직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죽은 젊은이들의 얼굴 그리고 오열하는 가족. 결국 이 다큐멘터리는 나를 강의실에서 거리로 내몰았고 세계를 매우 회의적이고 비판적으로 보게끔 만들었다. 생각에 이 화질이 조악한 다큐멘터리 한편이 나뿐만 아니라 80년 중반에 꿈에도 그리던 대학생활을 시작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머리와 가슴을 흔들어 내 인생에 영향을 끼친 영화 베스트 20을 꼽는다면 그중 한편으로 선정되지 않을까 하는데….

두 번째 영화는 보기 위해 헬리콥터와 맞서야 했던, 내 인생 최고로 관람의 과정이 지난한 작품이었는데 아마 이쯤 이야기하면 알 만한 사람들은 아 그 영화 할 게다. <파업전야>, 이 영화는 영화 한편이 대중에게 끼치는 무시무시한 영향(영화 한편을 위해 몇대의 헬리콥터까지 불렀다면 그 당시 정부가 얼마나 이 영화가 대중에게 영향을 끼칠까 겁냈던지를 알 수 있지 않을까)에 대해 다시 한번 깨닫게 했고 이 깨달음은 결국 언론에 대한 전문적인 공부의 길로 나를 이끌었다. 여기서 아직도 기억나는 장면 하나. 주인공이 스패너를 들면서 파업에 참여할 것을 결정하는 그 장면. 나를 너무나 전율하게 만들었고 스패너 대신 연필 자루 하나를 들고 지구 반 바퀴를 돌아서 있는 나라로 그리도 하기 싫었던 공부를 하게 만들었던 것인데….

그 <파업전야>의 전율을 다시 느끼게 한 내 인생에 최대의 영향을 끼친 영화는? 대학원 수업에서 본 <나이아가라>(제목을 붙인다면)라는 영화다. 이 영화는 오히려 활동사진이라고 부르면 더 정확할 것 같은데 몇분 안 되는 영화의 내용은 정말 아무것도 없다. 미국의 그 큰 나이아가라 폭포를 그냥 찍은 게 전부이다. 난 그 나이아가라 폭포물이 콸콸하면서 떨어지는데, 아니 내가 한국에서 읽은 무슨무슨 영화사책에 1910년대 한국에 소개되었던 영화제목들 중에 있던 작품 아닌가! 1910년대 나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보면서 경악해 마지않았던 그 활동사진을 근 100년 뒤에 내가 보고 있는 것이다. 책에서만 읽어 알고 있던 그 영화를 필름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한국영화 베스트 리스트에 한번도 빠진 적 없는 한국영화 최고의 우수작인 1961년작 <오발탄>의 오리지널 네거필름이 없고, 영문자막이 화면 전체를 덮은 질 나쁜 프린트로 영화를 봐야 하는데 도대체 이 미워만 했던 서양의 나라에서는 왜 이 100살이 다 된 영화가 무슨 영화제도 아니고 일개 대학원 수업에서 학생들을 위해 보여지고 있는가? 이게 도대체 무슨 차이인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고 결국 이 의문의 해결책을 찾기 위해 다시 한번 새로운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고 그 결정의 산물로 현재 내가 영화필름 1만여벌이 쌓인 섭씨 13도의 추운 보관고 안에서 이게 웬 보물창고냐 하며 행복해 하고 있으니, 아마도 이 <나이아가라>는 내 인생의 최고의 영화가 아닌가 싶다.

약간의 붙임말: 우리가 100년 뒤 100살 넘은 영화필름을 우리의 후손들에게 보여줄 수 있을까요? 그때도 한 영사기에서 다른 영사기로 필름의 권수가 넘어가는 그 찰칵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요?

관련영화

오성지/ 한국영상자료원 자료보존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