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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회고록 신상옥 13

<성춘향>으로 1960년대 영화제작의 기업화를 유도하다

”기업으로서의 가능성이 있는지를 시험했다"

1961년, 고전 서사 <춘향전>을 컬러 시네마스코프로 제작한 두편의 영화가 동시 개봉되어 경쟁한 사실은 영화사의 잘 알려진 사건 가운데 하나다. 익숙함에 대한, 그리고 변화에 대한 관객의 기대를 충족시켰던 신상옥 감독의 <춘향전>은 경쟁작을 압도했고, 영화 기업화라는 60년대의 화두와 결합했다. 당시의 기업화 열망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춘향전> 성공에 관한 감독 자신의 분석을 곰곰이 들여다보게 된다.

<춘향전>은 내가 한번 꼭 하고 싶었던 작품이다. 사실은 내 영화에 <춘향전>이 여러 번 나온다. <로맨스 빠빠>에는 주증녀가 춘향 어머니가 돼가지고 하는 게 잠깐 나오고, <코리아>라는 작품에도 <춘향전>이 나온다. 고전이 원래 한국 사람에게 끌리는 작품인데, 홍성기가 한 <춘향전>(당시 <성춘향>과 열흘 간격을 두고 개봉했다)하고 비교해봐도 우리의 경우는 줄거리를 한국 사람 구미에 맞게, 대중의 구미에 맞게 잘 끌고 나갔다고 보고 있다. 고증도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지금 봐도 별로 어색하지가 않다. <성춘향> 다음에 나온 <연산군>도 그렇고, 그때 고증이라는 걸 우리가 시작했다. 지금 테레비에 나오는 아류들이 전부 그때 우리가 했던 재판이다. 예를 들어서 사극에서 팔목 이렇게 기대는 사방침, 그게 원래는 그렇게 큰 게 아니다. 내가 <연산군> 때부터 과장해서 그렇게 맨들었기 때문에 커진 것이지. 또 내가 없어진 뒤에(납북 사실을 말한다) 소도구니 의상이니 전부 테레비 사극으로 갔을 것이다.

하여간 저쪽은 파워 센 국제극장에서 돈을 댔기 때문에 많은 돈을 쓰고 했고, 우리는 그때까지만 해도 돈이 없었기 때문에 고생하면서 했는데, 이상하게 그건 안 들고 우리 게 터졌다. 감독이 덮어놓고 먼저 맨들어 붙이면 된다는 생각만 했지, 작품을 제대로 맨들어야 된다는 생각을 못했다고 봐야지. 이심전심으로 아는 것 같애, 관객도.

그때 <성춘향> 흥행해가지고 천문학적으로 남았다고 그러는데, 서울에서 봉절하고 지방에서 봉절하고, 극장에서도 하고 야외에서도 하고. 원래 흥행이 잘되면 이동 영사기를 많이 썼다. 지금처럼 필름을 몇십개 뜨는 게 아니고, 일곱개 뜨니, 여덟개 뜨니, 각 도에 하나씩 주니 안 주느니 했으니까 흥행사들이 지방으로 돌면서 많이 틀었갔지. 영사조건도 엉망이었을 텐데, 그래도 처음 나온 천연색에다 시네마스코프니까 모두 신기해서 봤다.

<성춘향>은 한국영화가 기업으로서의 가능성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테스트 케이스였다. 결과적으로 제대로 맨들었고, 흥행이 됐기 때문에 기업으로 가능하겠다 이렇게 판명하게 된 것이지. 그때부터 신프로닥션이 커져가지고 외부 감독들 데려다 시켰고, 양산하기 시작했고, 나중에 안양촬영소 있을 때는 일년에 스물여덟개까지 맨들었다.

그때 기업화해야 되겠다 생각한 것은, 영화에 대한 이해를 가진 사람들이 별로 없기 때문에 투자를 받을 수가 없단 말야. 또 첫째 시설을 갖춰야 되갔으니까. 물론 ‘독립푸로’ 운동이라는 게 건전한 건 알지마는 아무리 건전해도 찍을 창고(스튜디오)가 없고, 기재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잖아. 기재도 우리는 좀 뒤떨어졌기 때문에 최신 기계를 안 들일 수 없었고. 예를 들어 대략 50mm 하나 가지고 시네마스코프 찍을 땐데 내가 <성춘향> 찍으면서 130mm니 망원렌즈니 들여왔다. <성춘향>에 들인 돈이…, 평균(60년 제작비 평균은 4천만환)의 두배쯤 됐다고 봐야지. 제작비의 삼분지 일이 필름하고 시설에 들어갔다.

오늘까지도 내가 가지고 있는 버릇은, 될 수 있으면 남의 자본에 의존하지 않는 형식을 취하는 것이다. 이북에 가서 김정일 덕으로 찍은 거 외에는 내가 직접 제작했지, 남의 돈으로 한 게 거의 없다. 남의 돈으로 한 게 있다면 처음 한 <꿈>일지 몰라. <성춘향>에서부터 시작해가지고 모든 제작비는 자기 돈으로 했지 외부에서 끌어들인 일이 없다.

궁극적으로 내가 택한 방향은 ‘블록 부킹’이다. 모든 전속관에 자기 영화만 붙인다는 거. 그래서 숫자가 스물여덟이다. 한달에 두개씩 붙이면(개봉하면) 일년에 스물네개가 되겠지만, 빨리 끝나는 것도 있었으니까. 그런 식으로 감독들의 총역량을 모아가지고 꾸려나갔기 때문에 우리 회사 와서 일 안 해본 사람이 거의 없다.

대담 신상옥·이기림

정리 이기림/ 영화사 연구자 marie320@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