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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사 신문 제21호(1952~1953)
심은하 2003-09-19

영화사신문 제21호

The Cine History

격주간·발행 씨네21·편집인 김재희

1922 ~ 1924

시네마스코프 시대 도래

2.55 대 1 와이드 스크린 <성의> 개봉, 스펙터클 앞세워 TV공세 대응

1952년 들어 가정에 텔레비전 보유대수가 크게 늘면서 위기의식을 느낀 미국 영화계가 ‘하드웨어’ 부문에 혁명에 가까운 기술 혁신을 시도하고 있다. 1952년 화면의 입체감을 강조한 ‘시네라마’(Cinerama)와 화면에서 사자가 관객 앞으로 튀어나오는 것 같은 3차원 영화 <브와나 데블>이 등장하더니, 1953년에는 정상 화면보다 가로로 훨씬 긴 ‘시네마스코프’(CinemaScope) 화면을 이용한 영화가 등장했다. 전문가들은 “시네마스코프로 시작된 ‘와이드 스크린’이 TV화면을 훨씬 뛰어넘는 웅장함을 선사하고 있어 향후 영화제작의 대세가 될지도 모른다”고 전망하고 있다. 영화제작 역사의 한 ‘혁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20세기 폭스사가 채용, 첫 번째 시네마스코프 영화인 헨리 코스터(Henry Koster) 감독의 <성의>.

1952년 9월 뉴욕에서 선보인 <이것이 시네라마다>(This is Cinerama)는 3대의 특수 카메라를 동시에 가동해 세 방향에서 화면을 영사함으로써 관객을 완전히 삼키게 되는, 롤러코스터에 탄 듯한 스릴을 제공하는 기행영화였다. 극장 근처의 약국들은 영화를 보다가 멀미하는 관객에게 멀미약을 팔아 한몫 잡기도 했다는 후문이다.

한편 최근 개봉한 이십세기 폭스사의 <성의(聖衣)>(The Robe)는 스크린의 가로:세로비율이 2.55 대 1로, 영화의 탄생 이후 표준으로 간주돼온 1.33 대 1에 비해 가로 방향으로 훨씬 긴 화면이다. 폭스는 텔레비전 보유대수가 가파르게 증가하는 상황에서 영화산업의 사활을 걸고 파격적 화면비율을 채택한 것이다.

<성의> 역시 시네마스코프라는 새로운 스펙터클과 깊은 신앙을 결합시켜 큰 성공을 거뒀는데, 이 영화 홍보담당자들은 시네마스코프의 넓은 이미지가 고대 그리스 연극의 타원형 무대와 같다는 사실을 거듭 강조했다. 관객은 마치 영화장면의 한가운데 있는 것 같은 현장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십세기 폭스의 성공에 이어 마릴린 먼로 주연의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와 <백만장자와 결혼하는 법> 역시 연이어 와이드 스크린으로 제작돼 이제 시네마스코프는 시장의 대세가 되어가고 있다.

성(性), 외설이라구? 예술이야!

할리우드 청교도적 제작강령 조롱, 성욕 그린 <푸른 달> 상영

밀려드는 TV 공세에 대항하기 위해 할리우드는 안방극장에서 다루기 힘든 좀더 논쟁적인 주제인 성문제를 다루기 시작했다. 제작자들은 좀더 과감한 주제의 제작윤리강령(Production Code) 비승인 영화들을 공급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제작강령은 더욱 약화됐다. 그 포문을 연 것이 독립제작자인 오토 프레밍거다. 영화산업 자체 검열기구인 미국영화협회(MPAA: Motion Picture Association of America)는 오토 프레밍거의 <푸른 달>(1953)의 승인을 거부했지만 유나이티드 아티스트는 이 영화를 개봉했다. 프레밍거는 계속해서 제작강령을 조롱하며 그의 작품을 MPAA의 승인없이 배급했고, 그럼으로써 그동안 자유로운 창작에 방해가 됐던 제작강령은 실효성을 잃어갔으며 오히려 제작강령을 거부한 영화는 역(逆)광고효과를 얻기도 했다. 프레밍거의 과감한 코미디 <푸른 달>은 문제적 처녀 매기 맥나마라를 호시탐탐 노리는 윌리엄 홀덴의 성적 욕망을 그린 영화로, 이 영화엔 예전에 외설스럽다는 이유로 터부시됐던 ‘처녀’라든가 ‘유혹하다’라는 단어들이 등장한다. 이 영화 개봉을 계기로 할리우드는 오랫동안 억눌려왔던 청교도적 가치관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뉴요커들 말라깽이 유럽공주에 ‘홀딱’

네덜란드 신인 오드리 헵번 <로마의 휴일>로 ‘만인의 연인’

윌리엄 와일러의 <로마의 휴일>은 막을 열자마자 뉴욕 관객을 단숨에 매료시켰다. 유럽의 한 젊은 공주가 로마에서 보내는 낭만적인 하루에 대한 보고서인 이 영화는 뉴요커들의 열광적인 환호 속에서 첫 시사를 마쳤다. 성공적인 시사로 흥행에 장밋빛 기대를 품게 한 사람은 무엇보다 이 영화로 첫 스크린 데뷔에 나선 네덜란드산 신인 여배우 오드리 헵번이었다. 사람들은 글래머러스한 여배우의 전통에서 벗어나는 헵번의 어린아이와 같은 깡마른 체구, 동경하는 듯 빛나는 미소, 그리고 유난히 크고 인상적인 눈매에서 더할 수 없이 가벼운 천상의 우아함을 보았던 것이다.

네덜란드 남작부인과 영국계 아일랜드인 은행가의 딸로 태어난 24살의 헵번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점령하의 네덜란드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그녀의 독특한 깡마른 체구는 종종 기아 상태에 놓여 있었던 그녀의 열악한 성장기를 증명하는 듯한데, 흡사 어린아이와 같이 가느다란 그녀의 몸매는 오히려 글래머러스한 여배우들의 전통 속에서 돋보이는 그녀만의 차별적인 매력으로 작용했다. 헵번은 원래 발레리나가 꿈이었지만 자신이 클래식 발레를 하기엔 너무 키가 크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전쟁이 끝날 즈음 런던 뮤지컬의 합창단에 들어갔다. 이를 계기로 프랑스 작가 콜레트에게 발탁되어 <지지>의 브로드웨이 공연 주역을 따내게 되었고, <로마의 휴일> 제작진들은 <지지>의 성공에 자신감을 얻어 그녀를 주저없이 공주 역으로 캐스팅하게 된 것이다.

<로마의 휴일>은 공식 방문차 로마에 들른 유럽의 공주가 신분이 주는 제약을 벗어버리고 홀가분하게 무단 이탈을 감행하는 하루 동안의 자유로운 외출과 로맨스를 그린 영화다. 오드리 헵번은 첫 스크린 데뷔작인 이 영화로 만인의 연인이 되었다.

중국영화, 아 옛날이여

중화인민공화국 들어 제작편수 급감, 그나마 대부분 선전용

1930∼40년대 유명 국제영화제에서 독창성을 인정받았던 중국영화가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에 따르면, 건국 이후 매년 큰 폭으로 감소해온 중국의 영화 제작편수는 건국 3년째인 올해(1952) 모두 8편에 그친 것으로 집계됐다. 그나마도 올해 제작된 8편의 영화들은 최근 2∼3년 새 제작된 <중국의 딸들> <백의의 천사> <강철전사> 등 ‘선전영화’들과 엇비슷하다는 지적이다. 평론가들은 “줄거리와 등장인물을 맞바꿔도 괜찮을 정도”라고 비난하고 있다.

건국 이전 1930∼40년대의 좌익 영화인들은 고유한 문화와 낯선 영화미학으로 빚은 시각적이며 중국적인 예술을 창조해냈다. 그 결과 당시 영화들은 중국 정치상황의 사실적 기록이자 소시민인 대중의 대변자로 독자적인 입지를 구축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예컨대 1934년 좌익 성향의 영화인들이 상하이에서 제작한 <어부의 노래>(漁光曲, 감독 차이추성 蔡楚生)는 이듬해 모스크바영화제에서 상을 받으면서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 당시 평론가들은 “검열과 정치적 탄압을 피할 목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중국영화 사상 최초로 사용된 변증법적 몽타주 기법은 형식적으로도 고도의 경지를 일궈냈다”고 평가했다. 국공내전 같은 혼란의 시기조차 <봄날의 강물은 동쪽으로 흐른다>(1947) 등 뛰어난 작품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중국 공산당의 영화제작에 대한 통제 때문에 영화계의 숨통이 죄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할리우드 해외로케 붐 잠재울까

영화배우조합 “자국시장 부진 원인” 성명, 상반된 주장도 있어

8천명이 넘는 할리우드의 프로배우들을 대변하는 미국 영화배우조합(the Screen Actors Guild)은 할리우드영화의 해외 제작편수의 증가에 강한 불만을 표시하는 리포트를 발표했다. 1953년에 발표된 이 리포트에 따르면, 당해 영화 제작편수가 사상 유례없는 최저 수치를 기록했다고 유감을 표했다. 더구나 이런 현상은 즉시 개선될 전망이 희박해 보인다고 내다봤다. 이 리포트는 현 미국 영화시장의 부진은 무엇보다 값비싼 영화 신기술의 할리우드 선점(先占)과 해외 제작편수의 증가 때문으로 보고 이를 강하게 비난했는데, 할리우드 영화감독들도 “미국영화의 국외 제작”이 국내 영화시장을 잠식하는 것에 저항해서 싸울 것과 “미국 내에서의 영화제작을 장려할 것”을 서약했다.

그러나 미국영화의 해외 제작 증가가 장기적 관점에서 봤을 때 반드시 국익에 반하는 것은 아니었다. 미국영화의 해외 제작은 무엇보다 와이드 스크린이라는 기술적 변화 때문이었는데, 와이드 스크린은 시원스런 스펙터클을 담기 위해 스튜디오 세트 촬영보다 이국적 지방색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해외 제작은 국내 제작보다 예산이 적게 든다는 이점이 있었다. 또한 해외에서 촬영함으로써 미국 제작자들은 자기네 영화를 세계의 곳곳에서 환영받을 수 있도록 해주는 여러 나라 배우들을 더욱 쉽게 끌어모으기도 했다.

이렇듯 영화와 스타들의 국경없는 자유로운 교류, 국가간의 합작과 해외 로케이션 영화의 증가는 관객에게 좀더 다양한 각국 문화 체험과 함께 할리우드영화만이 유일한 종류의 영화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찰리 채플린, 미국과 등지나?

<라임라이트> 이후 재입국 거부 당해, 공산주의 동조 혐의

1947년 <베르두씨> 이후 5년 만인 1952년 <라임라이트>를 연출한 63살의 거장 찰리 채플린이 미국을 영영 떠날 것으로 보인다.

채플린의 한 측근은 “영화 <라임라이트> 시사와 홍보를 위해 고국인 영국에 머물고 있는 채플린이 유럽의 한 국가로 이주해 정착할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이라고 밝혔다. 채플린이 이주를 고려하고 있는 국가는 스위스가 유력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매카시즘이 기승을 떨치는 와중, 채플린은 작곡가 한스 아이슬러와 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와 같은 ‘알려진 공산주의자’와의 교분으로 인해 공산주의 동조자라는 의혹을 받아왔다. 설상가상으로 올해에는 뮤직홀 코미디에 대한 정치성이 배제된 채플린의 자서전적 영화 <라임라이트>가 재향군인회가 주도한 전국적 보이콧의 대상이 되었다. 미국 시민이 아니었던 채플린은 미국에 재입국할 허가를 우선 확보한 뒤 영화 홍보를 위한 세계일주 여행을 떠났지만, 출국 직후인 9월 미국 법무장관은 채플린이 미국 재입국 허가를 받으려면 자신의 정치적 신념에 대한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 재향군인회 역시 채플린이 미국에 돌아와서 정치적 입장을 밝히기 전까지 <라임라이트>에 대한 보이콧을 계속 하겠다고 결의했다. 채플린은 의회반미활동위원회(HUAC: House Un-American Activities Committee) 앞에서 강제 증언했던 할리우드 동료들이 겪은 시련에 자신을 맡기기를 거부한 것으로 알려져 그의 유럽 망명은 거의 확실시되고 있다.

1930년대 <시티 라이트>(1931)와 <모던 타임즈>(1936) 등을 통해 현대 문명의 기계만능주의와 인간소외를 풍자했던 채플린은 40년대 들어 영화 속에서 정치적인 색채를 강화해갔다. 특히 5년 전 <베르두씨>에서는 제국주의 전쟁의 범죄성을 파헤치기도 해, 미국의 보수세력으로부터 공산주의자라는 공격을 받기도 했다. 정치적 박해로 인해 오랜 영화활동 중단 이후 만든 <라임라이트>는 정치색과는 무관한 영화로, 전성기가 지난 코미디언과 발레리나의 사랑을 통하여 삶에 대한 열정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묘사하고 있다. 이전 채플린 영화와 마찬가지로 채플린이 감독·제작·각본·주연을 도맡았다.

단 신 들

미조구치 겐지 <우게츠 이야기>베니스영화제 은사자상 수상

그 나라 고유의 전통과 문화에 깊이 천착한 영화가 전세계적으로 공감대를 얻는 것은 종종 있는 일이다. 1953년 베니스영화제 은사자상을 수상한 미조구치 겐지의 신작 <우게츠 이야기>는 탐미적 영상과 정제된 세련됨으로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격정적이면서 명상적인 이 영화는 일본 전통 장르인 역사적 프레스코화와 애가(哀歌), 환상 이야기와 가부키를 포괄하고 있다. <우게츠 이야기>는 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는 중세의 한 마을, 한 가난한 도공이 신비스런 여자(유령)에게 홀려 자신의 헌신적인 아내 곁을 떠났다가 후회하고 집에 돌아와보니 아내 역시 유령으로 변해버렸다는 초자연적인 이야기다. 미조구치는 아키나리 베다의 18세기 괴담과 프랑스 작가 모파상에게서 이야기를 착안했다고 회상했다.

데보라 카, 우아한 장미의 섹시 유혹

품위있고 우아한 이미지로 영국의 장미로 불리던 데보라 카가 일대 변신을 했다. 일본의 진주만 습격 며칠 전의 하와이를 배경으로, 한 군인의 금지된 사랑을 그린 제임스 존스의 소설을 영화화한 프레드 진네만의 <지상에서 영원으로>에서 그녀는 우아함 속에 숨겨진 섹슈얼리티를 과감하게 보여주었다. 데보라 카는 1947년부터 미국에서 활동하기 시작했지만, 멜로드라마와 모험영화 등에 출연해 주로 장식적인 역할을 하는 데 그쳤었다. 그러나 진네만의 <지상에서 영원으로>에서 그녀는 부정(不貞)한 부인 카렌 홈즈를 연기하면서 이전의 제약을 벗어버리고, 상대역 버트 랭커스터와 열정적인 해변 러브신을 연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