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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니 리펜슈탈, 존경과 비난의 생을 마감하다
권은주 2003-09-26

나치의 마녀 혹은 영화천재

레니 리펜슈탈, 존경과 비난의 생을 마감하다

김미숙/ 베를린 훔볼트대 영화학 박사·경기대 대우교수

21세기가 시작된 지 불과 몇년 지났지만 20세기의 기나긴 시간은 어느새 과거의 역사로 반듯이 자리를 잡고 지난 100년간 일어난 무수한 일들은 이제 잊혀지거나 묻혀서 역사의 기록으로만 남게 될 것이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논쟁의 대상이며 해결과제로 남아 있는 것 중 하나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끼친 영향이고 결코 잊혀져서는 안 되는 것이 가해자가 범한 죄의 행위이다. 비록 독일이 통일이 되고 유럽이 하나로 가고자 하지만 여전히 기록영화의 단골메뉴로 등장하는 홀로코스트에 대한 이야기는 과거를 단순한 역사의 기록으로서 기억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늘 상기하고자 하는 의미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독일의 영화감독이었던 레니 리펜슈탈(Leni Riefenstahl)의 죽음은 잊혀졌던 또는 잊혀지길 원했던 과거사에 대한 논쟁의 불씨를 다시금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지난 9월8일 밤 뮌헨 근교의 자택에서 101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 리펜슈탈은 100년이 넘는 삶을 통해 20세기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직접 체험하고 인생의 긴 시간만큼 다양한 삶을 살았고 그녀의 삶과 업적에 대한 평가 또한 삶만큼 다양하게 다뤄졌다. 그녀의 사망소식이 다음날 모든 언론에서 보도되고 특집기사로 다루어지고 장례식에 500여명의 각계각층의 유명인사 및 일반인들이 참석했을 만큼 리펜슈탈은 사람들의 주목의 대상이었지만 그들의 관심은 우호적이지만은 않았고 냉소가 담긴 것이었다. 존경의 대상이자 질타의 대상이었던 리펜슈탈에 대한 평가는 예술적 천재성을 발휘한 자신의 영화에 정치라는 민감한 문제가 가미되어 예술작품과 선전도구의 양면적 특성을 동시에 지닌 그녀의 선전영화에 대한 평가에서 나온 것이었다. 예술과 정치의 측면에서 예술가의 윤리적 양심과 책임감에 대한 논쟁은 리펜슈탈을 평생 따라다닌 굴레였고 그녀의 명성만큼이나 쉽게 벗어날 수 없었다. 에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100명의 예술가 중 유일한 여성으로 선정된 리펜슈탈은 결국 영화사에 가장 논쟁적인 감독 중 한명으로 기록될 것이다.

댄서에서 영화감독까지, 다섯번의 삶

그녀 스스로 언급한 “다섯번의 삶”처럼 무용수, 영화배우, 감독, 사진작가 그리고 스킨스쿠버였던 레니 리펜슈탈은 1902년 8월22일 베를린에서 태어나 처음엔 무용수로서 성공적인 삶을 시작했지만 사고로 다리를 다치게 됨으로써 영화배우의 길을 가게 되었다. 1926년 독일영화의 독특한 장르인 “산악영화”의 선구자인 아놀드 팡크(Arnold Fanck)의 영화 <신성한 산>(Der heilige Berg)으로 데뷔하여 수많은 모험영화와 산악영화에서 주연을 맡았던 리펜슈탈은 대중의 인기를 한몸에 받는 스타배우로 성장하였다. 배우로서 활동하며 영화감독으로의 길을 준비하던 그녀는 드디어 1932년 신비롭고 로맨틱한 산악영화 <푸른 빛>(Das blaue Licht)에서 주연 및 감독으로 감독데뷔를 하고 이 영화는 그해 베니스영화제에서 은상을 수상함과 동시에 큰 성공을 거뒀고 이는 나치당수인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계기가 되었다. 히틀러와의 첫 만남 이후 두 사람은 서로를 존경하는 마음을 토대로 친한 친구관계를 맺게 되었고 이후 그녀가 히틀러의 여인이었다는 소문은 무성했지만 사실은 밝혀지지 않은 채 호기심과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히틀러의 관심과 믿음으로 리펜슈탈은 1933년 나치정당을 위한 첫 번째 기록영화 <신념의 승리>(Sieg des Glaubens)를 만들게 되고 나치당의 모습을 미화시켜 선전영화의 표본을 제시하여 히틀러의 총애를 받는 기록영화 감독이 되었다. 다음해 히틀러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제작한 <의지의 승리>(Triumph des Willens)는 나치당의 뉘른베르크 전당대회를 담은 기록영화로서 영화사뿐만 아니라 나치와 히틀러에 대한 대표적 인용자료로 이용될 정도로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선전영화 중 하나로 꼽히게 되었다. 영화감독으로서의 전성기를 맞은 리펜슈탈은 1936년 베를린올림픽을 계기로 막대한 비용과 당시의 최신기술과 최고인력을 이용하여 최고의 스포츠영화로 기록된 <올림피아>(Olympia)를 만들어 기록영화의 독보적인 존재로 올라섬과 동시에 세계적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 두편의 영화로 리펜슈탈은 기록영화의 예술성과 창조성을 제시한 영화의 천재라는 찬사와 함께 정치의 선전도구라는 비난을 동시에 받게 되었다.

1935년작인 <의지의 승리>는 나치를 위한 완벽한 선전영화였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을 기록한 <올림피아>는 최고의 스포츠영화였지만 이 역시 나치를 위한 선전도구라는 비난을 피하기는 힘들었다

이후 오페라 <낮은 땅>(Tiefland)을 영화로 만들었지만 전쟁과 건강상의 이유로 완성하지 못한 채 종전이 되고 결국 리펜슈탈은 전범으로 1948년 재판대에 섰지만 석방되었다. 이 영화는 비로소 1954년에 완성되어 상영되었지만 아무런 성과없이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나치의 협력자라는 과거의 행적으로 더이상 영화작업을 하기 힘들었던 리펜슈탈은 이제 감독의 길을 접고 사진작가로의 인생을 시작하였다. 조국을 떠나 아프리카에서 원주민들과 생활하면서 그들의 자연적인 모습을 사진에 담고 노년의 나이에 스쿠버다이빙을 배워 해저의 아름다움을 직접 사진과 영상으로 담아냈던 그녀의 사진작품과 사진술은 그녀에게 다시금 세계적 명성을 가져다주었다. 지난해 100살의 생일을 앞두고 발표한 해저의 생태를 담은 <수중의 인상 >(Impressionen unter Wasser)으로 최고령 기록영화 감독으로 기록된 것처럼 노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100살이 될 때까지 리펜슈탈은 끊임없이 작업하고 활동하여 그녀가 카메라에 담고자 했던 건강한 육체의 산 표본으로 생명력 넘치는 강인한 삶을 살았다. 오랜 세월 그녀에게 향했던 비난은 사진집이 편찬되고 회고록 및 전기가 쓰여지고 주요 도시에서의 전시회를 통해 재조명되면서 서서히 사라지고 있지만 최근의 그녀의 죽음은 그녀의 운명을 결정지었던 두편의 영화가 다시금 재조명되고 재평가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것이다.

완벽한 선전영화 <의지의 승리>

<의지의 승리>는 1934년에 촬영되어 35년에 완성된 2시간가량의 기록영화로서 나치독일의 위상을 알리기 위해 제작되어 국내뿐 아니라 외국에서 상영되었고 베니스영화제 등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였다. 이 영화의 제작의도가 선전선동의 효과를 최대한 노리는 데 있었기에 영화의 중심에는 전당대회의 중심인물인 히틀러가 있어야 했고 대규모의 대회모습을 보여주어 강함과 거대함을 느끼게 해야 했다. 리펜슈탈의 감독으로서의 재능은 이 뻔한 장면을 특이하게 연출하는 데 발휘가 됐으며 비록 선전영화였지만 형식의 새로움으로 가득 찬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냈다.

비행기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히틀러의 모습과 그를 맞이하는 군중의 환호를 시작으로 영화는 히틀러를 인간을 구제하기 위해 지상으로 내려오는 신의 모습으로 상징화하면서 그의 위대함을 묘사한다. 영화의 중심에는 늘 히틀러가 서 있고 히틀러가 내려다보는 광장에는 엄청난 규모의 군사와 군중이 정렬하여 환호를 보낸다. 감동과 존경의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고 충성을 맹세하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정렬하여 행진하는 군인들의 모습이 화면을 채우고 히틀러의 연설모습과 사열하는 장면은 강하고 위대하게 보이는 데 빛을 발한다. 이런 역동적이고 박진감 있고 웅장한 느낌을 담아내기 위해 리펜슈탈은 대형 나치깃발이 펄럭이는 깃대에 카메라맨이 탈 수 있는 엘리베이터를 설치하거나 광장 위에 직접 도로를 건설하고 소방차나 사다리차를 이용하고 곳곳에 카메라를 설치해 다양한 위치에서 다양한 각도로 대상을 잡을 수 있었다. 또한 히틀러의 모습과 그를 우러러보는 군중의 모습을 교차편집 하여 마치 성스러운 종교의식을 보여주는 것처럼 연출하고 나치표시, 깃발 그리고 독수리 모습 같은 대표상징물들을 조명과 음악효과를 통해 강조하여 나치당을 신비스럽게 보이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 영화 이후로 히틀러에 대한 영화는 더이상 만들어지지 않았고 만들어질 필요성도 없었던 것은 그가 보여지길 원했던 모습은 여기서 다 보여졌기 때문”이라는 말처럼 이 영화는 선전영화로서 더할 나위 없는 완벽한 작품이었다.

1945년 이후 이 영화는 당시의 살아 있는 기록으로 각종 영화나 TV에서 인용되었고 히틀러의 신격화로 보여졌던 장면은 정반대로 악마적인 존재로서의 히틀러를 묘사하는 데 이용되어 지금까지 나치즘의 일반적 모습으로 각인되었다.

논쟁의 기록영화 <올림피아>

<올림피아>는 2편의 장편영화로 이루어지는데 1부는 <민족의 제전>(Fest der V lker), 2부는 <미의 제전>(Fest der Sch nheit)으로 건강한 육체의 찬미를 위해 모든 기술적 예술적 방법이 만들어낸 대작이다. 4시간가량의 영화는 무려 18개월간의 후반작업 뒤에 1938년에 개봉하여 나치독일이 올림픽을 통해 국제적인 강국의 위용을 보여주려고 했던 의도대로 외국에서 경탄과 찬사로 받아들여져 영화제 및 IOC로부터 수상하였다. 육체의 자연적 미와 그 모습을 담아낸 촬영과 세련된 편집을 통한 인위적인 미의 완성은 이 영화를 최고의 기록영화 중 하나로 인정받게 한다.

<의지의 승리>의 시작처럼 1부는 고대 그리스의 신전에서 출발하여 베를린까지의 긴 여정을 사실이 아닌 연출을 통해 극적인 효과를 발휘하여 육체의 아름다움에 대한 서곡을 울린다. 육상경기와 마라톤경기를 다룬 1부는 카메라의 다양한 촬영기법을 통해 역동성과 생동감을 전하고 클로즈업이나 느린 동작, 그림자의 모습을 담아 감정의 흐름을 느끼게 한다. 선수와 환호하는 관중의 모습을 교차편집하여 박진감을 전하는데 이는 음악, 음향, 환호성 등의 후반 더빙작업을 통해 더욱 실감나게 느끼게 한다. 기구에 자동카메라를 설치하여 하늘에서 떠다니며 촬영한 개회식 장면이나 높이뛰기 도약대 옆에 구덩이를 파고 트랙 주변에 카메라용 레일을 설치하거나 운동장 곳곳에 카메라를 설치하여 담아낸 장면은 경기장의 분위기를 그대로 전달해낸다. 마라톤 장면은 선수들의 인간승리와 건강미 넘치는 육체의 모습을 담아내고 특히 복부에 채워진 카메라는 배 아래로 향해 선수의 발을 느린 동작으로 촬영하여 마치 발이 땅에 달라붙는 것처럼 보이게 함으로써 마라토너의 지친 몸을 시각적으로 보여줌으로써 기록영화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2부는 기타 다른 경기를 보여주면서 육체의 아름다움에 초점을 맞춘다. 조정경기는 자동카메라를 보트에 설치하여 한팀의 선수의 시점에서 본 조타수의 구령하는 모습을 담아 역동성을 강조하고 다이빙 경기는 아름다운 육체의 연출의 절정을 이룬다. 카메라맨이 물속에서 선수를 아래에서 잡아 하늘을 배경으로 새처럼 하늘을 나는 모습을 담아 날고자 하는 인간의 꿈을 실현시킨 것 같은 느낌을 주어 신비로움으로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다양한 촬영기법과 독특한 편집리듬을 살려 새로운 기록영화를 보이지만 후반작업의 더빙이나 실제 경기가 아닌 연출된 장면, 선후 촬영은 엄격한 의미에서 기록영화라 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영화에선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으로는 선전영화의 요소를 거의 발견할 수 없으나 나치의 이상적 인간상으로 보여진 대중의 모습이나 근육질 선수들의 건강한 육체의 강조를 통한 숭배적 요소는 선전영화의 일면을 제시한 것이었다. 개봉 뒤 흥행에도 성공했으나 국제정세의 악화로 적대관계의 국가에서 상영금지되거나 냉대받다가 이 영화는 1952년 이후 다시 상영이 가능해졌고 그 이후 끊임없이 논쟁거리가 되었다.

나치의 여신. 혹은 희생양?

이 두 영화는 그 예술성과 창조성에 대해선 이의를 제기할 수 없으나 예술가의 윤리적 책임에 대해선 간과할 수 없는 문제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리펜슈탈의 90살을 계기로 레이 뮐러(Ray M ller)가 만든 그녀에 대한 기록영화 <영상의 힘>(Die Macht der Bilder)에서 리펜슈탈은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시키고 희생양으로 주장했던 것처럼 그녀는 늘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고자 했다.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 무지하기조차 했던 그녀는 그러나 “히틀러의 카메라 눈”, “나치즘의 여신”이라는 오명을 떨칠 수는 없었다. 만약 자신의 행동을 인정하고 순순히 받아들였다면 훨씬 더 빨리 명예를 회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 예술가의 명예가 과연 도덕적 양심에서 벗어나서 단지 예술가의 욕망을 채우는데 정당할 수 있는지 생각하게 한다. 여기서 독일이 낳은 또 다른 전설적 배우였던 마를렌 디트리히(Marlene Dietrich)의 행동은 리펜슈탈과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같은 베를린 출신으로 한 해 먼저 태어나 10년 먼저 타계한 디트리히는 스타배우였음에도 불구하고 달콤한 유혹을 뿌리치고 미국으로 망명하여 나치를 반대하는 운동에 목소리를 높여 자기 민족으로부터 매국노라는 냉대를 받아 그 명예가 회복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결국 그녀는 독일의 자부심으로 자리매김을 했다.

리펜슈탈이 한 인터뷰에서 “죽음이 속죄하는 데 가장 바람직한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던 것처럼 이제 그녀가 속죄의 마음으로 편안히 잠들길 바라며 더불어 두 작품 이외의 다른 창조적 작업에 대한 평가를 통해 창조적 예술가로서의 재평가가 이루어지길 바라며 또 한편으론 조디 포스터가 리펜슈탈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 계획을 한다는 보도에 “20세기의 그 어떤 여자도 그녀처럼 찬사와 비난을 받지 않았다”는 인물을 어떤 모습으로 그려낼지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