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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 안에 담기는 모든 것을 본다,<불어라 봄바람> 스크립터 유지혜
권은주 2003-10-01

“<불어라 봄바람> 촬영 마지막날이었는데, 현장에 가기가 싫은 거예요. 가면 끝나게 되니까…. 끝나는 게 정말 섭섭하더라고요.” 지난번 스타덤 취재로 만난 김승우가 한 말이다. 평소 입발림 소리와 거리가 먼 김승우의 말 때문인지, 스크립터 유지혜(23)를 만나자마자 자연스레 현장 분위기부터 묻게 됐다. 그녀에겐 <…봄바람>은 이제 두 번째 현장 경험일 터였다. “장 감독님 다음 작품 같이 하기로 했어요. 그 전까진 좀 쉬게 될지도 모르죠.” 그녀의 대답은 간략했고, 또한 명쾌했다. 감독에 대한 강한 신뢰가 눈 속에서 반짝거렸다. 대학에서 연기를 전공한 그녀는, <유아독존>의 연출부 객원 스탭으로 영화판에 입문했다. 캐스팅 보드(출연진들의 명단과 사진이 붙은 판)를 꾸미는 게 그녀의 첫 임무였다.

단역을 맡기겠다는 제안도 있었지만, 정작 카메라 앞에 선 것은 <…봄바람>의 스크립터가 된 이후였다(그녀는 여기에서 심 작가가 뻔질나게 출입하는 미용실의 보조미용사로 등장한다). <유아독존>이 처참하게 흥행에 실패하고 나서, 그녀는 다시 <…봄바람>의 스탭을 지원했다. 왜 연기자에 도전해보지 않았냐는 질문에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연기에 대한 미련이야 아직 있죠. 하지만 <유아독존> 현장에서 객원 스탭으로 일하면서 정식 스탭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어요. 특히 스크립터는 프리 프로덕션 단계서부터 편집, 믹싱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살펴볼 수 있어 매력적이었어요.” 훤칠한 키와 애교스런 외모, 노래 강사인 어머니와 한때 방송사에서 일했던 아버지 덕에 남들보다 많은 끼를 갖춘 그녀가 연기를 전공한 것은 자연스러워 보였다.

“학교엔 그야말로 죽어라 하는 애들뿐이었어요. 환장한 애들 속에서 전 그 정도로 미쳐지지 않더라고요. 대신 워크숍에는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참여했어요.” 단편을 찍을 때면, 연기에 몰입하는 과정보다 영화 한편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대해 더 관심이 갔다는 그녀는, 경력자만 뽑겠다는 장 감독의 마음을 돌려 스크립터의 직함을 따내고야 말았다. 그녀가 느끼는 스크립터의 매력이란 무얼까.

“스크립터요? 대부분은 연출부와 같은 의미로 받아들이긴 하지만 엄연히 역할이 다르죠. 카메라 안에 담기는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위치예요. 인물, 의상, 소품, 세트, 소리, 색깔…. 모든 것이죠. 신에서 신으로, 컷에서 컷으로 옮겨갈 때 최대한의 동질성을 부여하는 일이 스크립터의 몫이잖아요.” 감독만큼 화면을 자주 보는 위치다보니 이젠 대사와 상황 모두 외울 정도다. 단역으로 출연하며 입었던 미용 가운이 보기보다 편리해 수첩, 볼펜, 리모컨, 콘티 등을 넣고 다녔더니, 침을 흘리는 사람이 많았다. 캐리어에 실린 모니터 위치에 맞도록 목욕탕 의자를 구입했더니 그것 역시 탐내는 눈빛들이더니, 결국 둘 다 없어져버렸다. “빌려가신 분들, 꼭 좀 돌려주세요. 알았죠?” 글 심지현·사진 정진환

프로필

1981년생 · <유아독존> 연출부 객원 · <불어라 봄바람> 스크립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