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내 인생의 영화
나는 재니스 조플린의 화신이다, <서머 타임>
2003-10-02

나는 재니스 조플린의 화신이다. 1970년 10월4일 새벽, 약물과다로 인해 그녀의 영혼이 서서히 사그라들고 있던 바로 그 시각에, 나는 세상에 나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차가운 주검이 되어 마룻바닥을 뒹굴던 시각에 나는 태어났다. 전생을 지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나 역시 한동안은 그녀의 존재조차 모른 채 지내야만 했다. 처음 그녀가 부르는 <서머 타임>(Summer Time)을 들었을 때, 전신을 휘감던 전율을 아직도 나는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너는 네가 아니야, 너는 나야… 울지 마, 울지 마. 영혼 속을 울리는 그녀의 목소리는 내게 치열한 삶에 대한 열망을 가르쳐주었다. 스무살이 막 되던 해였다. 나는 온종일 그녀의 목소리가 담긴 음반을 데크에 걸고 헤드폰을 낀 채 눈물을 흘려댔다. 그녀의 고통이, 그녀의 열정이 내 삶 안에 온전히 스며들 때까지 나는 죽을 힘을 다해 그녀의 노래를 따라 불렀다. 목구멍이 갈라져 피가 나올 것만 같았지만 어쨌든 나는 재니스 조플린의 화신인 것이다. 내가 재니스 조플린의 화신인 것을 아는 사람은 얼마 없었다. 어쩌다 마음이 통할 것 같은 사람을 만나 내 신상의 비밀을 털어놓기라도 하면 대부분 기이한 표정으로 물끄러미 내 얼굴을 들여다보곤 했다. 한번은 우연히 장준환을 만나 그의 단편영화 의 스토리를 듣고 “어, 그거 내 얘기하고 똑같네…”하며 신이 나서 떠든 적도 있었다. 그때 그의 눈도 그랬었다. 고생대 삼엽충의 화석을 발견한 듯한 눈빛. 그런 일을 몇번 겪고 난 이후, 나는 내가 그녀의 화신이라는 사실을 더이상 말하지 않게 되었다.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어차피 언젠가는 모두들 알게 되리라. ‘그녀처럼 치열한 인생을 살다가 그녀처럼 스물일곱에 죽어야지….’ 그게 내 치밀한 앞날의 계획이었다.

하지만 마침내 스물일곱이 되었을 때, 나는 알고 말았다. 내가, 재니스 조플린의 화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저 우연히 그녀가 죽은 날 태어났을 뿐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것은 목소리만이 아닌 그녀의 실체를 담은 필름을 보고 난 뒤 절실하게 온몸을 파고든 깨달음이었다. 당시 내가 유학 중이던 파리에서는 그녀의 생존 당시의 자료들을 모은 다큐멘터리 필름 <제니스>(Janis)가 상영되고 있었고 그 누구보다도 그녀를 알고 싶었던 나는 개봉하기가 무섭게 극장 안으로 몸을 내던졌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터질 듯한 그녀의 음성이 귀를 찢기 시작했다. 목소리로만 상상하던 그녀가 바로 눈앞에서 펄펄 살아 움직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자 나는 질투심에 불타올라 비겁하게 눈물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그녀처럼 치열하게 살지도 못했고 자살하지도 못했던 나는, 절망했다.

록(Rock)의 3J 중 하나로서 진주(pearl)라고 불리던 여자, 교내에서 가장 못생긴 남학생(!)이라고 선정될 정도로 못생겼지만 그 누구보다도 매력적이었던 여자, 내 전생이라고 착각했던 그, 재니스 조플린이 스크린이 부족할 지경으로 열기를 뿜어내는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내가 살고 싶었던 열정의 집 안에서 영원히 살고 있을 그녀를 향해 눈이 짓무르도록 애탄 시선을 보냈었다. 그녀가 온몸으로 <서머 타임>(Summer Time)을 부르고 있었다. 울지 마, 울지 마, 울지 마! 어떻게 하면 그처럼 타오를 수가 있는 거지? 도대체 어떻게 하면 그처럼 온몸으로 살아 숨쉴 수가 있는 거지?

재니스 조플린의 전기영화, 재니스(Janis)로 인해 내 스무살 적 꿈은 산산조각이 났지만, 때때로 나는 <서머 타임>의 구절구절들을 목이 쉴 때까지 따라 부른다. 일상의 권태에 시달릴 때, 혹은 힘들어서 다 그만둬버리고 싶을 때마다, 그녀가 내 머릿속에서 선명한 동영상으로 남아 좀더 치열하게 살라고, 거기가 끝이 아니라고, 울지 말라고, 언제까지나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기 때문이다.

정안나/ 문화백수·파리8대학 연극예술 석사